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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사표 수리 안 할 권리? / 임범

등록 2013-09-30 19:41수정 2013-10-03 18:52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청와대가 검찰총장에 이어 보건복지부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네, 마네를 놓고 잇따라 논란이 벌어졌다. 인터넷 검색창에 ‘사표’를 쳐봤다. “(문) 회사가 사표를 수리하지 않는 것이 정당한 권리인가? (답1) 아뇨. (답2) 당연히 정당한 권리가 아닙니다. 근로자는 이직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일반 회사는 그렇겠지만 장관, 검찰총장 같은 고위공직자는 다르지 않을까. 아는 변호사들에게 물어보고, 관련 법령도 들춰봤는데 ‘사표’나 ‘수리’ 모두 법령에서 찾기 어려운 단어였다. 그럴 거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는데, 돈을 미리 받아 썼거나 하는 등의 특별한 계약이나 조건이 없다면, 일 그만두겠다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못 그만두게 할 권리는 없을 거다.

사표를 내고 수리되길 기다리는 건, 법적인 구속력 때문이기보다 함께 일하던 이들을 떠나 다른 곳, 다른 길을 가는 참에 남은 얘기들을 나눠보자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면서 오해가 있으면 풀고, 가는 이든 남는 이든 일과 삶을 새삼 생각해 볼 기회를 갖자는 미풍양속에 가까울 거다. 그러니 고용자 혹은 임명자가 사표 수리를 미루는 건 한 번 더 함께 일하기를 진정으로 권할 의지가 있을 때 할 일이다. 아니라면 빨리 수리하는 게 예의이다.

사표를 수리하지 않은 채 달래고 싸우다가 다시 일하게 되는 사례가 일반 회사에선 드물지 않게 있다. 그래서 실제로 그만둘 생각이 없이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고위공직자들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행동에 따르는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관이 사표를 냈는데 청와대가 수리하지 않아 다시 일한 사례도 드물다.

법무부가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을 감찰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총장더러 나가라는 얘기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채 총장이 낸 사표를 청와대가 수리하지 않고 감찰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잡고 있겠다고 했을 땐 의아했다. ‘나가라 그래 놓고 사표를 수리하지 않겠다고?’ 이건 매우 단호한 결정으로 비쳤다. 사표를 수리하지 않는다는 건, 감찰 결과 의혹이 풀리면 다시 총장 일을 하도록 하겠다는 얘기다. 그건 의혹이 사실이 아니면 법무부 장관은 물론이고 그 이상, 청와대 비서실장 정도까지 물러나게 하겠다는 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법무부 감찰 결과가 혼외아들 논란에 마침표를 찍겠구나, 그만큼 명쾌한 결과를 내놓겠구나 싶었다. 감찰 지시를 해서 의혹에 무게를 실은 게 법무부 장관인데, 그래서 총장이 사표를 냈는데, 그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는 건 둘 중 하나는 나가야 한다는 말임에 더해 논란을 종식시킬 만큼 명쾌한 결과를 내놓을 책임을 법무부에 지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무부는 논란을 잠재우지 못한 채 청와대에 사표 수리를 건의했고, 청와대는 법무부에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사표를 수리했다.

사표를 붙잡고 있는 기간 동안, 검사들의 반발이 잠재워진 것 빼고 무슨 변화가 있었던가. 결국 사표를 수리하지 않은 행위에 진심이나 예의가 있었는지, 그 행위야말로 제스처에 불과한 건 아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영 전 복지부 장관 건도 개운치가 않다. 사표 수리를 미룬 게, 정말 그와 다시 함께 일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가 항명한다는 인상을 더 남기고 싶어서였을까.

영화 <공공의 적>에, 주인공 형사가 사표를 쓰면서 봉투에 ‘물러날 사(辭)’ 자가 안 떠올라 ‘죽을 사(死)’ 자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사표는, 한 사람의 인생의 무게를 실은 결정의 산물일 거다. 실제로 죽고 사는 일일 수 있다. 사표(辭表)를 수리하지 않고 있다가 사표(死表)로 만들어 돌려주는 일은 정말 보기가 좋지 않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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