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동서양을 막론하고 두려움은 늘 극복의 대상으로 지목돼 왔다. 두려움을 소재로 한 숱한 명언과 격언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겨내라고 속삭인다. 두려움에 맞서기로 결심한 순간 두려움은 증발한다, 두려움 없는 사람이 가장 빨리 정상에 오른다, 오직 한 가지 두려워해야 할 일은 두려움 그 자체다 등등. 동양에서도 ‘임난불구’며 ‘임위불구’니 해서 어려움이나 위기에 처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강조한다. 공자도 “군자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그러고 보면 지난 5월 미치 매코널 미국 상원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을 “두려움에 움츠러들지 않는, 강인한, 매우 특별한 여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대단한 헌사다. 실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모습을 지켜보면 어느 것 하나 두려워하거나 거리끼는 게 없어 보인다. 그런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날이 갈수록 더하다.
여기에 비하면 야당 지도자들은 너무 겁이 많아 탈이다. 원외투쟁을 하면 국민이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검찰 수사의 칼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보수언론들이 벌떼처럼 공격하면 어떻게 하나 등 두려워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잇따른 선거 패배에다 각종 악재까지 겹치면서 야당은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이 어느덧 체질로 굳어져 가는 듯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집권 기간 내내 독선적인 정치를 펼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겁없음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인다. 촛불 사태 때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며 국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가 상황이 바뀌자 곧바로 표변한 예에서 보듯, 이 전 대통령에게는 담대함보다는 졸렬과 야비, 치사, 옹졸 등의 단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그것에 비하면 박 대통령은 똑같이 독선과 오만, 불통의 정치를 하면서도 이 전 대통령과는 달리 도도하고 오연(傲然)한 냉기류가 흐른다. 때로는 그런 점이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북한은 최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둘러싼 남한 내 소용돌이를 비판하며 2002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북 당시 발언을 공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북한의 이런 협박을 박 대통령은 두려워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걸핏하면 내놓는 엄포 정도로 받아들이거나, 설사 공개하더라도 ‘터무니없는 거짓말’ ‘남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책동’쯤으로 몰아가면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정치인에게는 큰 자산이다. 하지만 담대함이 꼭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국민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치명적이다. “두려운 존재는 백성”(可畏非民)이라는 <서경>의 한 대목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통치자가 백성과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어찌 보면 백성을 위하는 위민(爲民)이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愛民)보다도 백성을 두려워하는 외민(畏民)이야말로 정치인들에게는 더 필요한 덕목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박 대통령한테서는 ‘외민’의 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을 위하여”라는 말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데서도 나타나듯이 위민과 애민 정신은 넘칠지 모르지만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서는 전해오지 않는다. 잘못된 인사로 파문을 빚어도, 대선 때 철석같이 내걸었던 공약들을 파기해도, 비리 전력자 측근을 특혜 공천하면서도 늘 그렇다. 자신만큼 국민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없다는 자기최면에 빠진 나머지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어디론가 증발해버린 것이다.
정상회담 대화록 문제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경고와 위협에 끄떡하지 않는 것은 좋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야 할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사초 폐기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나눈 대화의 기록을 제대로 남겼는지부터 되돌아볼 일이다. 지금의 국정운영 전 과정을 한치의 숨김 없이 정밀한 사초로 남기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박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저는”이라고 말했는지 “나는”이라고 말했는지도 정말로 궁금하다.
두려움은 겸허함과 삼감을 동반하는 미덕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국민을 위한다는 믿음의 늪에 빠져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다가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박 대통령의 ‘두려움 없음’이 참으로 두렵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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