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소설집 <토끼 사냥>을 출간한 일본 작가 나카자와 게이 씨가 한국에 왔을 때였다. 그 책을 담당했던 편집자가 평소 품고 있는 질문을 했다. 그날 그 모임의 통역자는 한 명뿐이어서 서로의 이야기를 제때제때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편집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일본어 단어를 총동원했다. 그때 그녀가 쓴 표현 중의 하나가 ‘라멘야’였다. 나카자와씨는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직역하자면 라면집. 미리 나카자와씨의 소설을 읽어 단편 속에 등장하는 라면집에 대한 정보가 있어서였기도 했을 것이다.
나카자와씨와는 십여년에 걸쳐 서너번 만났다. 첫 만남은 토지문화관에서였다. 그때 박경리 선생님은 환영사에서 일제강점기에 관한 추억을 떠올렸고 아직도 그때의 고통이 남아 있다고 이야기했다. 나이가 지긋한 축의 일본 작가들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띄엄띄엄 일본말을 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젊은 작가들에게 놀랐노라고 일본의 한 작가가 나중에 말하기도 했다. 나카자와씨는 한국어와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나도 일본어 단어 몇 개를 늘어놓는 수준이었는데도 우리는 통역 없이 통했다. 필담 때문이었다. 한자로 되지 않으면 그림을 그렸다.
그날 나카자와씨는 끝까지 ‘라멘야’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라면집이라고 부르지 않고 혹시 분식점이라고 부르는 걸까. 편집자의 질문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라멘야. 편집자는 물론이고 나도 그즈음 ‘홍대’에 하나둘 들어서는 일본 간판에 익숙해져 있었다. 간판 대부분이 이자카야라는 단어였다. 무슨무슨 단어 뒤에 붙는 집을 뜻하는 ‘야’. 그럼 술을 파니 이자카야가 아니라 ‘사케야’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가. 라면집이 일본 작가에게 통하지 않은 건 바로 그런 맥락일 듯했다.
지난 6년여 ‘홍대’에 있으면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우리가 ‘홍대’라고 일컫는 홍대의 영역이 사방으로 방대하게 넓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2년여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우후죽순 들어선 이자카야와 일본식 카레, 돈가스, 우동 가게들로 골목골목이 마치 일본의 한 골목 같아졌다는 것이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 일층, 돌잔치 전문점이 사라진 자리에 얼마 전 대형 이자카야가 들어섰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그 전에 일본 영화 거장들의 영화를 불법 경로를 통해 구해서 친구들과 돌려보았다. 그보다 한참 전에 캔디, 코난은 물론이고 세계 명작동화를 각색한 일본 만화영화를 보고 자랐다. 누구보다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사쿠라기가 아닌 강백호여야 맛이 산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 문화 완전 개방 15년,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화는 물론이고 가요까지 되레 우리 드라마와 가요가 수출되고 한류 스타들이 배출되었다. 하네다 공항이었을 것이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간 연예인 때문에 공항이 그를 마중 나온 일본 아주머니들로 난리가 난 걸 보기도 했다.
그런데 입맛만큼은 확실히 달라졌다. 홍대의 맛집 중에는 일본의 일품요리 집이 많다. 달짝지근한 맛이 젊은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일까. 시키지도 않는데 한 상 가득 나오는 우리 상차림이 부담스러워서일까. 왜 그렇게 일본의 골목을 연상시키는 듯 일본 음식점들이 들어서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입구로 들어서면 귀청 떨어지게 들려오는 건 “이랏샤이마세!”다. 건물 밖을 요란한 장식들로 덧댄 이자카야 앞을 지날 때면 돌아가신 박경리 선생의 정색한 얼굴이 떠오른다.
한때 유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게 좀 걱정이다. 바로 입맛이라서 걱정이다. 입맛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걱정이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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