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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맥줏집의 어린이들 / 김흥숙

등록 2013-11-29 19:08

김흥숙 시인
김흥숙 시인
나이 덕에 대학생들과 고전을 읽는 모임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만큼 즐거운 건 이 모임에 교수로 참여하는 초로의 동료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젊은이들이 고전을 제대로 소화하여 최소한의 교양을 갖게 할까 고민하다 보면 저녁 식사는 끝나도 얘기는 남습니다.

그날도 식당 부근의 맥줏집에 옮겨 앉아 얘기를 이어가는데 갑자기 실내가 소란스러워지며 앞사람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서너 살짜리 아이들이 떼쓰는 소리에 삼십대 초중반 부모들이 얼렀다 야단쳤다 하는 소리가 섞여 홀 전체가 거대한 소음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아니 왜 술집에 애들을 데려오나?” “저쯤 되면 애들 데리고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요즘 젊은 부모들이 저래요. 한마디 하면 싸우자고 할 테니 그냥 둬야 해요.” 동료들은 눈으로만 화살을 쏘았습니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손님 하나가 일어섰습니다. “거 좀 조용히 합시다!” 제법 점잖게 일갈했지만 저편에선 “아니, 애도 안 키워 봤나? 손자도 없어!” 하는 외침이 돌아왔습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일어선 이를 다독였습니다. “그만둬. 저런 사람들하고 무슨 말을 섞나?” 섰던 사람은 “그만둡시다, 그만둬.” 잦아들며 앉았지만, 손자도 없냐는 고함은 한참 계속되었습니다.

오래전 엄마 노릇을 시작하는 제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어른들 모이는 곳에 애를 데려가면 안 돼. 애는 어른이 아니라서 애야. 결국 눈총 받고 욕먹게 돼. 애가 욕먹는 거 싫으면 절대 그런 곳에 데려가지 마. 네 애는 너한테나 귀하지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귀한 건 아니야.”

친구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던지, 아무도 아이를 카페나 술집에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카페나 술집에서 만나야 할 때는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기고 왔고 그럴 수 없는 상황이면 집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른들의 놀이터에 아이들이 오고 있습니다. 책을 읽거나 차 마시며 담소하던 카페가 애들이 뛰어노는 운동장이 되었고, 모처럼 목을 축이며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푸는 술집에서조차 어린이의 칭얼거림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일으키는 소음도 괴롭지만 카페나 술집이 그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생각하면 더욱 괴롭습니다. 작고 약한 몸이 견디기에 공기는 너무 나쁘고 음악 소리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더구나 술집에선 무장해제를 하고 아이가 되는 어른이 많습니다. ‘하라는 것’ 대신 ‘하는 것’을 보고 배우는 어린이들에게 학교 아닌 곳은 없고 술집은 일탈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얼마 전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후배가 원어민 영어교사로부터 “한국엔 미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후배가 이유를 묻자 그 외국인은 “여러 나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았지만 한국 아이들처럼 버릇없고 기본적인 예의나 규율도 지키지 않는 아이들은 본 적이 없다.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고 그 사람들이 투표권을 행사해 나랏일을 결정할 테니 이 나라에 미래가 있겠느냐?’고 하더랍니다.

입장권이 있어야 놀이공원에 가고 기차표가 있어야 기차를 탈 수 있듯 예의를 지켜야 문명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습니다. 논어 맹자를 읽고 니체와 하이데거를 논한다고 교양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티피오’(T:시간 P:장소 O:상황)에 맞게 행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학위나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교양인이 아닙니다.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도 구별하지 못하고 기본적인 예의조차 가르칠 수 없다면, 부디 아이를 낳지 마셔요. 무례한 사람이 넘쳐나는 이 나라, 그래도 ‘동물의 왕국’이 되는 건 막아야 하니까요.

김흥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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