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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호의 궁지] ‘느슨함’의 힘: 오픈 스페이스 테크놀로지

등록 2013-12-02 19:01수정 2013-12-02 19:02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2005년, 2박3일 일정으로 당시 일하던 미국 기업의 아태지역 사장단 회의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여느 때와 달리 회의 시작 때까지 공식 회의 일정이 나오지 않았다. 20여명의 참석자들이 살짝 어색하게 원을 그리고 앉은 상태에서 아태지역 대표는 ‘오픈 스페이스 테크놀로지’란 방식으로 향후 전략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목표만 보여주고,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참석자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진행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우리들은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살려 회사에 공헌하고 싶은 방향을 생각해보고, 원 중심에 놓여 있던 종이에 논의하고 싶은 내용을 자유롭게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심사가 비슷한 참석자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여 토론을 했다. 오픈 스페이스 테크놀로지란 회의 진행 방식을 나는 이렇게 처음 체험했다.

2007년 오픈 스페이스 테크놀로지 방식을 창안한 해리슨 오언이 직접 진행하는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롱비치에 갔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100여명의 전문 코치들 역시 원으로 둘러앉았다. 이때도 정해진 회의 일정이 없었지만, 한 시간 만에 2박3일의 일정을 참석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한 그룹에서 다른 그룹으로 마음이 가는 곳으로 옮겨다니며 자유롭게 토론했고 시작과 끝내는 시간은 유연했다. 일정을 마칠 때까지 책 한 권 분량의 아이디어가 완성되었다. 1985년 시작된 이 방법론은 지금까지 130여개국에서 듀폰·보잉 등 기업은 물론이고 지역사회 갈등 해결 등을 위해 10만번 넘게 사용되었다.

정부와 기업, 학교에서 회의를 하는 모습은 꽤 전형적이다. 탁자 한쪽 끝에 최상급자가 있고, 그 반대편 끝에서 슬라이드를 띄워놓고 발표하면 나머지 참가자는 그저 듣는 경직된 분위기다. 질문을 하면 발표자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최상급자의 질문은 추궁처럼 들리니 이런 분위기에서 조직의 미래를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통제와 창조성은 반비례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과 공동체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각자 공헌하고자 하는 방향과 ‘마음이 쓰이는’ 곳은 모두 다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쓰이는지 묻지 않는다.

지난 11월30일 서울 어린이대공원의 30년 뒤를 상상하는 워크숍을 진행하며 오픈 스페이스 테크놀로지를 사용했다. 주로 기업을 위해 일하던 나로서도 이번 경험은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회의를 통해 나온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더 의미있었던 것은 청소년과 중장년층,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100명 가까이 모여 공동 목표를 위해 5시간 동안 평화롭고 느슨하게 의견을 내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모습 그 자체였다.

우리 사회는 ‘긴장 사회’이다. ‘높은 사람’들이 창조성을 바란다면 회의에서도 긴장을 덜어내야 한다.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라’고 지시해서 자유롭게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아니다. 회의나 토론에서 지나친 엄숙함과 긴장을 벗고 효과적으로 아이디어가 오가려면 ‘높은 사람’의 구실이 중요하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회의 공간을 활짝 열어주고, 그들의 열정과 책임감을 믿어주며, 그들이 진정 마음을 쓰는 방식으로 공헌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전문가들도 동의하듯 창조력이 넘치는 회의는 지휘자가 악보에 따라 연주를 이끌어가는 오케스트라보다 서로 신뢰하며 즉흥연주를 주고받는 재즈밴드와 흡사하다. ‘높은 분’들이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과 미래 전략 개발에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 회의 방식부터 바꾸어 보면 어떨까?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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