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달력이 꼭 한 장 남고 성탄절이 다가온다. 매년 이맘때(대림절) 전국의 모든 성당에서 부르는 성가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둠을 없이하며….”
2000여년 전 로마의 식민지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거대제국의 억압에 짓눌리면서 그 옛날 조상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킨 민족의 지도자 모세를 그리워했고 돌팔매 하나로 태산 같은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나라를 구한 영웅 다윗 왕의 세상을 꿈꿨다. 억압이 심할수록 구원자,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염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사방에서 “내가 바로 그다.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떨치고 일어났다 스러져간 사람들이 숱했다. 메시아들의 난립 시대였다. 그런 와중에 나사렛 사람 예수가 등장한다. 예수는 특히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그들과는 완연히 달랐다. 그 ‘다름’이 고금동서를 통틀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까지 바쳐가며 그를 진짜 메시아라고 고백하게 한 이유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구촌 곳곳에서 출몰하는 메시아들, -미국의 오바마, 한국의 박근혜, 북한의 김정은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들을 놓고 진위를 가리기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리스도 신자는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 사람이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신국)가 오기를 학수고대할 뿐 아니라 직접 건국사업에 몸 바치는 사람들이다. 그들 앞에 나타난 메시아의 식별 기준은 당연히 예수다. 메시아라 부른다고 다 메시아가 아니다. 모든 면에서 예수와 같아야 현대판 진짜 메시아다. 한데 박 대통령의 그간의 언행을 보면 예수를 쏙 빼닮기는커녕 달라도 너무 다른데다 닮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안 보이니 가짜 메시아는 권좌에서 내려오라는 게 전주교구 사제들의 발언의 골자다.
그런데 도무지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하루아침에 “박근혜는 아니다”가 “김정은이다”로 둔갑한 것이다.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괴수 김정은을 섬기며 사제복 뒤에 정체를 숨긴 종북좌빨은 이 땅에서 씨를 말려야 한다고 소리소리 지르는 ‘애국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나라 망쳐 먹을 놈들이라고 길길이 날뛴다. 드디어 새빨간 본색이 드러났다는 투다. 모든 수구언론들이 목소리를 합쳐 셀프첨병으로 나섰음은 물론이다. 갑자기 전국이 시끌벅적해졌다. 탓은 몽땅 정의구현사제단과 박창신 신부에게 뒤집어씌운다. 아무리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세상이라 해도 그렇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논리가 통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상식으로는 박근혜 정부와 여당의 이상야릇한 논리나,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얼룩무늬 제복들의 궐기나, 감히 대선불복이냐는 으름장에 움찔하는 야당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예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마태 7,21)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에 맞지 않으면 교회의 사제까지도 가차없이 종북좌빨로 매도하는 자칭 독실한 신자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 글을 쓰다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나이가 대략 일흔쯤으로 짐작되는 남자는 자기를 우리 교회의 신자라고 소개하더니 다짜고짜로 목청을 높였다. “군산의 박 모라는 신부, 그 사람 어째 그래? 종북분자 아니오? 그런데 내가 보니까 당신은 그 사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아. 차라리 신부복 벗고 정치를 하든가 이북으로 가든가….” 누구시냐고 재차 물었지만 계속 소리만 지르기에 그냥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언젠가 반모임에 갔다가 학생들에게 전해들은 동네 어르신의 녹음방송을 오늘 아침에는 생방송으로 들었다. 요즘 나는 이 정권을 대놓고 비난한 일이 없는데도 이러니….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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