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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겨울산과 루빈의 잔 / 법인 스님

등록 2013-12-13 19:05

법인 스님 해남 일지암 암주
법인 스님 해남 일지암 암주
지금 두륜산은 낙목한천의 품새로 겨울맞이를 하고 있다. 그 무성하고 푸르던 잎새도 어김없이 제행무상의 질서에 따라 모든 것을 훌훌 털어냈다. 미련 없이 털어낸 자리에 무엇이 드러나는가? 옛사람이 말한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온갖 수식을 벗고 온전한 그대로를 드러내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겨울산의 면목에서 오묘한 자연의 도리를 읽게 된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함’이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산을 소재로 하는 선시는 비록 비유와 은유를 달고 있지만 대부분 직설화법이다.

법정 스님이 즐겼던 시를 음미해 보자. “본래 산에 사는 사람이라/ 산중 이야기를 즐겨 나눈다./ 5월에 솔바람 팔고 싶으나/ 그대들 값 모를까 그게 두렵네.” 돈과 권력으로는 살 수도 값을 매길 수도 없는 솔바람의 청량한 느낌을 우리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깊은 산속 불법은 바위가 그것/ 큰 바위 작은 바위 저마다 둥글다/ 거짓 부처님 만드느라고/ 공연히 벼랑 깨어 법신 상했네.” 꾸밈없는 마음과 온전한 자애 그대로가 부처와 하나님일진대 우리는 자꾸만 그분들을 어려운 설교와 대형 성전에 가두고 있다.

산에서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가 부처이고 설법이다. 그러나 늘 있는 부처를 알아보고 자연의 설법을 알아듣는 몫은 각자에게 있다.

요즘 나는 산에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분류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히려 자연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훤히 잘 보인다. 산에서는 이성과 논리보다는 그 사람이 내쉬는 기운에 감응하면서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왠지 사람을 긴장시키고 무겁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 보는데도 오래전 인연인 것같이 친근하고 편안한 사람이 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평가를 일부러 하려는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산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보이는 것이다. 먼저 예의와 배려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어제도 산에서 한 무더기의 쓰레기를 주워야 했다. 쓰레기도 그냥 쓰레기가 아니라 반쯤 먹고 버린 인공 용기에 담긴 도시락이다. 또 암자 마당에 소주병과 음식 찌꺼기를 두고 갔다. 한숨이 나오고 우울하다. 많이 배웠으나 잘못 배워서 문제라는 지적이 딱 맞다. 귀찮아서 버렸겠지만 버리고 가는 마음이 편안할까. 이들에게 산과 하늘과 바람소리는 그저 건강을 위한 도구거나 정복의 대상이며 눈을 즐겁게 하는 풍경일 뿐이다.

또 산에서는 설명하는 사람과 느끼는 사람이 있다. 설명하는 사람은 산과 암자에 오면 먼저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다. 눈으로 생생하게 산을 마주하기보다 화면으로 걸러서 산을 본다. 또 차를 공부한다는 다인들 중에는 차 맛에 은은히 젖기보다는 차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기 바쁜 경우도 있다. 산을 오르면서 세속의 권력관계나 연예인 이야기에 골몰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반해 느끼는 사람은 침묵하며 느리게, 자세하게, 따뜻하게, 나무와 하늘을 본다. 지그시 눈을 감고 초겨울 서늘한 바람소리를 듣는다. 그의 얼굴은 깊고 고요하고 맑고 평안하다. 산의 풍경과 기운에 몰입하여 무심과 합일의 기쁨을 누린다. 이 어찌 복된 삶이 아니겠는가.

산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루빈의 잔’이 생각난다.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면 그것만 보이고 그 나머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눈과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으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의 가치와 욕망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올곧은 관심과 집중이 필요한 법이다. 미련 없이 모두를 털어내고 비워낸 겨울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법인 스님 해남 일지암 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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