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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공약 경쟁’이란 ‘집단 사기극’을 걷어치우라

등록 2014-01-27 19:15수정 2014-01-27 21:26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정부에 모든 공약을 당초 약속대로 실천하라고 요구하는 건 야당과 야당 지지자밖에 없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대통령과 여당을 골탕먹이려 대통령의 공약을 그대로 믿었던 양 의뭉을 떨고 있다.” (<조선일보> 2013년 10월14일치 사설 중에서)

공약이라는 게 원래 선거가 끝나고 나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법이다. 그것이 공약의 타고난 운명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공약을 지키라는 요구는 유권자의 당연한 권리다. 그런데도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을 졸지에 대통령을 골탕먹이려는 사악한 인간들로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공약에 대한 언론의 이중적 태도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선거 전에는 “정책 중심 선거를 하자” “공약을 꼼꼼히 따져 투표하자”며 야단법석을 떨다가도 막상 선거가 끝나면 태도가 변한다. ‘대선 공약 조정, 주저할 일 아니다’(<동아일보> 2013년 12월24일치 사설) 정도는 기본이고, ‘선심 공약에 휘둘릴 셈인가’ ‘공약에 얽매이지 말고 버릴 것은 버려라’ ‘당선자가 해도 될 선의의 위약’ 등 공약 파기를 부추기는 글이 넘쳐난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공약 파기는 ‘비정상의 정상화’로까지 의미가 격상됐다. “박 대통령이 ‘과거의 비정상적인 것들을 정상으로 되돌려 기본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만큼 비정상적인 대선 공약을 먼저 바로잡는 결단력을 보일 필요가 있다”(<동아일보> 2013년 8월16일치 사설)는 주문도 나왔다. 이쯤 되면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무엇인지조차 아리송해진다.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외눈박이들만 사는 나라에 가면 비정상인이 된다는 말이 실감난다.

공약 파기를 부추기는 근거는 주로 국가재정 문제다. “공약을 다 지키려고 하면 나라 곳간이 거덜난다”는 주장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그런데 문제는 예산 문제가 수반되지 않는 정치 공약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개헌이나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등의 공약 파기가 그것이다. 그런데도 보수언론들은 별로 흥분하지 않는다. 여야의 정치적 속셈을 양비론적 시각으로 비판하거나, 공약 파기 자체보다는 그 후유증 정도를 염려하는 수준에 머문다.

보수언론들이 이렇게 열렬히 응원해주니 박근혜 대통령은 거칠 것이 없다. 27일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박 대통령은 정치권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골치 아픈 사안은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투다. 그러면서 청와대 쪽은 이렇게 변명한다. “후보 공천 문제는 정당의 몫인 만큼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결정할 일이지 청와대가 나설 일이 아니다.” 그럴 거면 애초 대선 과정에서부터 “기초선거 공천 문제는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어야 옳다. 박 대통령이 ‘딴청 모드’로 들어가면서 이제는 공약 파기를 사과할 주체마저도 모호해졌다. 사과를 하든 말든 그것은 새누리당이 결정할 일이라는 게 박 대통령의 생각인 것 같고, 새누리당은 엄밀히 말해 공약의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 정치 문제를 늘 국회의 몫으로 돌리는 일관성을 보인 것도 아니다. 개헌 문제에 대해서는 “블랙홀”이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지 결코 ‘국회에서 논의해서 발의하면 될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나서기 불편한 사안은 국회에 떠넘기다가도, 확실한 잡도리가 필요하다 싶으면 직접 나서서 새누리당에 가이드라인을 정해주는 교활한 전략이다.

사실 공직자를 뽑을 때 공약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후보 자체라는 게 평소의 개인적 지론이다.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 철학과 이념, 역사적 인식 등이 교언영색으로 포장된 공약보다 더 값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지는 공약의 초토화 현상은 이를 생생히 웅변한다.

이제 6월 지방선거가 가까워 오면 여기저기서 또다시 공약 타령이 울려 퍼질 것이다. “바람에 휘둘리지 말고 공약을 꼼꼼히 점검해 찍자”는 언론의 근엄한 훈계도 되풀이될 게 분명하다. 모든 것이 결말이 선명한 집단적 사기극이다. 사기를 치는 집단도 문제지만 사기극인 줄 알면서도 번번이 속아 넘어가는 유권자들도 참으로 문제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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