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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규제망국론의 망국적 위험 / 박순빈

등록 2014-03-18 19:21

박순빈 논설위원
박순빈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의 화법은 독특하다. 아주 복잡한 의제를 칼로 두부 썰듯 간단하게 정리한다. 표현을 바꿔가며 같은 말을 끈질기게 반복하는 것도 큰 특징이다. 요즘 박 대통령은 입만 열면 규제개혁을 강조한다. ‘원수’, ‘암 덩어리’ 등 거친 표현이 난무하지만,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규제망국론이라 할 수 있다. 요즘 발언만 보면, 규제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른 느낌이다.

그러나 규제망국론은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 더구나 박 정부가 규제망국론을 꺼낼 자격이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집계로는, 박 정부 출범 뒤 규제완화를 부르짖는 동안에도 등록 규제가 한 달에 평균 100여건씩 늘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성공 사례로 내세운 ‘규제개혁’을 거꾸로 되돌린 경우도 있다.

오락가락 규제정책은 정부에 대한 불신과 혼란만 초래한다. 그런 혼란 가운데 하나가 정부와 출판업계가 법정 공방까지 불사하며 다투고 있는 고등학교 교과서값 파동이다. 올해 새학기를 앞두고 교육부는 검인정 교과서를 발행하는 출판사들이 고등학교 교과서 예정가격을 평균 70%가량 올리려고 하자 급하게 제동을 걸었다. 인상 억제를 권고하는 동시에 2월에는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교육부 장관이 가격조정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조항을 슬쩍 끼워넣었다. 그리고 교육부는 올해 교과서값을 예정가보다 50~60% 낮추라는 명령을 예고하고 있다. 교과용 도서 규정 개정은, 박 대통령의 시각으로 보면 규제 혁파가 아니라 복원이다.

출판사들은 조정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행정소송으로 맞설 태세다. 2010년 8월 정부가 규제개혁 차원에서 교과서값 자율화 정책을 도입해 놓고서 이에 역행하는 규제를 만들어 소급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출판업계의 주장이다. 겉만 보면 출판업계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교과서값 규제에 관한 정부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정부가 ‘통합규제정보포털’(better.go.kr)에 올린 <이명박 정부의 규제개혁 이야기>라는 정책자료집을 보면, 교과서값 자율화의 기대 성과가 이렇게 나와 있다. ‘이제 출판사는 교과서 개발에 투자를 늘려 질 높은 교과서를 개발하는 만큼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되었고 발행사 간에 경쟁도 촉진되었다.’

하지만 규제개혁 차원의 가격자율화는 학부모의 교과서값 부담만 키웠다. 자율화 이후 통계청이 집계한 고등학교 교과서값은 28.7% 올랐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 3.6%보다 8배나 높다. 참고서 가격지수는 0.02% 떨어진 것으로 봐서 종이값 등 불가피한 원가변동 요인으로 교과서값 인상을 설명하기도 어렵다. 여기에다 또 한꺼번에 70%가량 올리겠다고 하니 교육부의 가격인상 통제는 당연하다.

규제는 ‘규칙과 제도’의 줄임말이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시장 참가자들 간의 상호의존을 조직하는 수단으로 규제는 꼭 필요하다. 규제가 없으면 시장은 야만과 탐욕이 판치는 정글이 될 수밖에 없다. 규제는 총량으로 더 많거나 더 적어야 한다고 판단할 수 없다. 따져야 할 것은 규제의 목적이 타당한지, 또 규제 설계에서부터 적용까지 공정성이 있는지 여부다. 목적은 공익적이어야 하며, 규제를 없애거나 바꾸는 작업은 투명하고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규제개혁 작업은 기업 편향적이다. 기업활동을 돕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기업의 목소리만 반영하고 있다. 탐욕스런 경제권력에 포획된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권력은 차라리 규제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규제망국론을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망국적 위험을 야기한다.

박순빈 논설위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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