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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죽음의 행렬, 생명의 상상력 / 고명섭

등록 2014-04-17 18:49

고명섭 논설위원
고명섭 논설위원
이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감탄’과 ‘경탄’을 구분했다. 눈을 의심케 하는 대상을 보고 놀라워하는 것이 감탄이라면, 의심이 풀린 뒤에도 놀라움이 가시지 않는 것이 경탄이다. 우리는 놀라운 마술을 보고 감탄하고, 마술의 비밀을 알고 그 절묘함에 다시 경탄한다. 칸트에게 생명 현상이 바로 그런 경탄의 대상이었다. 막막한 우주 한 귀퉁이 대지 위에 생명을 지닌 유기체가 탄생해 번성한다는 것만큼 경탄스런 일이 있을까. 칸트는 유기체의 본성을 나무를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나무는 전체로서 완결돼 있음과 동시에 부분으로서 독립돼 있다. 나무의 ‘접붙이기’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무의 눈을 다른 나무의 가지에 접붙이면 그 눈이 낯선 가지에서 자라나 잎이 된다. 마찬가지로 어린 가지를 다른 나무에 접목해도 큰 가지로 자란다. 나무의 이런 특성에 주목한다면, 한 나무의 모든 가지들이 그 자체로 독립한 각각의 나무이고 그 나무들이 서로 접목돼 나무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나무에서 관찰한 대로 유기체는 전체와 부분이 서로에게 목적인 관계를 이룬다. 부분은 전체를 키우고 전체는 부분을 살린다. 칸트는 유기체 내부의 부분들끼리도 서로 도와주고 보완하는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유기체의 한 부분이 손상되면 이웃의 다른 부분들이 그 손상된 부분을 복구해주고 대신해준다. 유기체의 그런 특성은 기계장치와 비교해보면 한결 더 두드러진다. 칸트는 시계를 예로 든다. 시계의 부품들은 그냥 도구일 뿐이다. 톱니바퀴가 빠졌다고 해서 옆 톱니바퀴가 대신하지도 않고 고장 난 톱니바퀴를 다른 톱니바퀴가 고쳐줄 수도 없다. 이것이 시계장치와 유기체의 다른 점이다. 유기체의 부분들은 서로 보완해주고 살려주고 치유해준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쓰던 중에 프랑스혁명(1789년)을 목격했다. 프랑스인들은 이 혁명으로 세운 새 나라를 유기적 조직, 곧 유기체라고 불렀는데, 칸트가 보기에 그건 아주 적절한 명명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전체 속에서 각각의 지체는 한갓 수단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유기체라고 하면 전체주의 국가를 연상하기 쉽지만, 칸트의 설명을 따라가면 유기체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이 드러난다. 전체주의는 부분을 전체의 수단으로만 삼는다. 개인은 전체주의 국가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유기체 속의 개체는 각각 독립성을 누리면서 동시에 전체를 위해 일한다. 전체는 부분들이 자유와 자존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다.

칸트의 비유를 빌려 말하면, 지금 이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나무의 상상력이 아니라 시계의 상상력이다. 세상은 톱니바퀴처럼 냉정하고 사람들은 못 쓰게 된 부품처럼 교체된다.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다. 버려진 ‘세 모녀’들은 지하셋방에 고립돼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다. 죽음, 죽음, 죽음의 행렬이다. 그런가 하면, 국가인권위원회가 국제사회로부터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나라에선 개인의 삶이 그냥 방치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툭하면 국가권력에 짓밟힌다. 유사 전체주의적인 인권 탄압과 신자유주의적인 개인 방치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중 상황이 연출하는 비극의 뒤편에서 기득권세력이 시계의 태엽을 감고 조인다. 약자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튕겨 나간다. 비극의 끝에서 생목숨들이 무더기로 스러진다. 이 비인간적인 세상이 계속되어선 안 된다. 시계장치가 아닌 싱싱한 나무의 정치적 상상력, 가지들이 푸르게 뻗어 오르는 아름드리 생명나무의 상상력을 키워야 할 때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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