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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그날 이후 / 하성란

등록 2014-04-18 19:08수정 2014-04-18 20:39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완전완전강하게키워야해.’ 세월호 사고 소식을 주고받던 차에 동생이 쐐기를 박듯 문자를 보내왔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째에게 얼른 수영과 잠수를 가르치라는 말 끝이었다.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시간에도 생사를 알 길 없는 많은 이들이 차가운 바닷속에 있었다.

어떻게 해야 아이를 강하게 키울 수 있는 건지 잘 모른다. 몇 해 전에 사둔 〈SAS 서바이벌 백과사전〉이라는 책을 꺼내 바다 편을 펼쳐보았다. 지구 표면의 5분의 4는 생존하기 가장 어렵고 위험한 환경인 바다로 덮여 있다고 시작된 글에는 구명정 훈련은 배가 출항한 직후 바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세월호의 탑승자들은 구명조끼 착용법조차 연습하지 않았다. 매뉴얼은 아예 지켜지지 않았다.

실종자 대부분이 학생들이라 더 억장이 무너진다. 학생들은 가만히 기다려라, 선실이 안전하다는 안내방송을 그대로 따랐다가 배 밖으로 탈출하지 못했다.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을 숱하게 했다. 아이를 잠깐 세워둔 채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는 물론이고 동물원에서 엄마 손을 놓치게 되면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라고 했다. 그 말은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는 걸로 바뀌었다. 혹시나 일탈 행동으로 선생님의 눈 밖에 날까봐 두려웠다. 어른의 말을 잘 듣는 순응적인 아이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의 안내방송을 믿고 가만히 기다렸을 것이다.

뉴스를 보는 가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안 둘째가 영웅들이 오면 다 구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둘째는 요즘 미국 만화의 영웅들이 주인공인 영화에 빠져 있다. 아이의 말에도 웃을 수 없다. 웃는 것도 너무 미안하다. 왜 저런 상황에 아이언맨이나 토르가 출동하지 않는 건지, 현실과 영화를 혼동하는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요즘 내 표정도 아이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배가 기우뚱 기울었는데도 전원 구조할 수 있다고 낙관한 정부는 신속히 움직이지 않았다. 헬기 몇 대와 배 몇 척이 기우뚱한 배 옆으로 떠 있던 광경에서 사고의 긴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사이 우리 눈앞에서 배가 가라앉았다. 관계자들은 한때 학생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냈다. 구난함은 배가 가라앉은 다음날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기상 악화와 시계가 좋지 않아 구조가 늦어진다는 말도 귀에 익은 말이었다. 관계 부처 간에 혼선을 빚고 우왕좌왕했다. 그사이 시간은 20년 뒤로 되돌아갔다. 서해훼리호 사고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여덟 살 우리 둘째처럼 영웅의 출현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지금은 2014년이다. 20년 전 서해훼리호 때 우리는 사고를 신문 보도를 통해 접했다. 지금처럼 실시간 뉴스나 에스엔에스(SNS) 등으로 사고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넘어지는 여객선을 쏜살같이 달려와 받쳐줄 구조함은 없었다. 배가 침몰했지만 생존자를 구하러 들어갈 첨단 장비도 없다고 했다. 과학의 이 불균형한 발전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1993년 10월 그날이 떠오른다. 그 끔찍한 사고로부터 보름 뒤에 결혼식이 잡혀 있었다. 결혼의 불안과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때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던 것은 누구였나. 그 뒤로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차례로 일어났다.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 또한 순응하는 아이로 키워졌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혹시 우리가 다음 지침이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기 때문은 아닐까. 경악하고 분노하고 잊히는 과정이 우리 속에 하나의 매뉴얼처럼 심긴 것은 아닐까.

나는 운좋게 47년을 살아왔다. 그 행운이 미안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행운이 이어질지 나도 모른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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