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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캡틴, 오 마이 캡틴

등록 2014-04-23 19:06수정 2014-04-24 09:36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경험 없는 선장은 파도를 피해가지만 경험 많은 선장은 파도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만이 파도를 이기는 방법임을 알기에….” 거센 비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깜깜한 바다. 금방이라도 침몰할 듯 요동치는 배의 모습과 함께 흘러나오는 성우의 내레이션. 18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 쪽이 방영한 텔레비전 광고 제2탄 ‘위기에 강한 글로벌 리더십 편’의 첫 부분이다.

우연치고는 고약하다. 섬뜩하기조차 하다. 일엽편주 흔들리는 배는 도리 없이 세월호를 연상시킨다. 폭풍우 속에 침몰해가는 배는 박근혜 정부, 아니 대한민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비탄과 원망의 파도, 절망과 한숨의 비바람이 온 천지에 가득하다. 자식 잃은 부모의 가슴에 구멍이 뚫리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배 밑에도 구멍이 뚫렸다. 과연 우리의 선장은 어디에 있는가.

“저런 무능한 공무원들을 데리고 일하는 대통령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며칠 전 탑승한 한 택시 기사의 말이다. 그런 여론이야말로 지금 청와대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일지 모른다. ‘무슨 일만 일어나면 모든 것을 대통령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다, 아무리 대통령이 열심히 해도 밑에서 받쳐주지 못하니 어쩌란 말이냐?’ 등등의 여론 말이다. 그런 주장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선장의 능력과 리더십이 중요한 법이다. 박 대통령이 스스로 선장을 자처한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선장 모습을 보면 원숙한 항해 경험, 파도 속으로 들어가는 담력과 지혜는 고사하고 선장이라는 의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선장 대신 ‘1등 항해사’가 대국민 사과를 한 것부터가 그렇다. 선장은 슬그머니 배에서 빠져나와 감독관의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아랫사람을 꾸짖고, 눈치 보는 선원들을 잘라버리겠다고 윽박지른다. 이래서야 세월호 선장의 무책임과 도덕적 해이를 탓할 일도 못 된다. 혹시 청와대는 지금 상황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이라는 ‘젖은 돈’이나 말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무능한 장관을 뽑고 윗사람 눈치만 보는 관료 조직을 방치·조장한 책임도 오롯이 선장의 몫이다. 이번 사고와 관련된 핵심 부처인 해양수산부와 안전행정부만 예로 들어보자. 자질 논란 시비로 많은 사람이 반대한 전임 윤진숙 해수부 장관을 굳이 임명한 것도 박 대통령이었다. 그를 해임한 이유도 업무에 대한 본질적인 평가와 무관한 것이었다. 국회 인사청문회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는 ‘선발 규정’을 제대로 지키고 이 나라의 항해사·기관사를 뽑은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전임 안전행정부 장관이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이전에는 해마다 10명 이상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지만, 지난해에는 50년 만에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을 때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무슨 헛소리요. 그런 태도가 바로 문제요”라고 따끔하게 질책했어야 옳았다. 그렇지만 박 대통령은 아부에 흐뭇해하고 자신의 ‘치적’에 으쓱했을 게 분명하다. 비극은 이미 곳곳에 잠복해 있었던 셈이다.

눈길을 돌려보면 정부의 무능과 책임 회피는 단지 세월호 사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기강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는데도 ‘남재준 구하기’에만 몰두하는 정신으로는 ‘국민 구하기’는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인권 경시와 인명 경시가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모르는 한 ‘화합·안전·행복’의 약속은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제 이 정권이 지향하는 가치와 국정운영 방향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엿볼 수 없다. ‘대통령 책임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똑똑하고 자애로운 대통령, 무능하고 무책임한 공무원’의 도식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월트 휘트먼의 시 ‘오 캡틴! 마이 캡틴!’은 남북전쟁 뒤 암살의 총탄에 쓰러진 에이브러햄 링컨에 바치는 시다. ‘배는 무사하고 안전히 닻을 내리고 항해는 끝났다/ 그러나 갑판 위에 쓰러져 싸늘하게 죽은 나의 선장님….’ 링컨이 아메리카호를 무사히 항구에 안착시킨 것은 깨알 지시 덕도, 엄단과 처벌을 앞세운 으름장 덕도, 받아쓰기 식 조직 운영 덕도 아니었다. 지금 우리 선장은 자신의 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배를 무사히 항구에 닿게 하려고 하는가. 오, 캡틴, 우리들의 캡틴이여!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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