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논설위원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서 철학을 가리켜 “사상으로 포착한 자기 시대”라고 했다. 시대를 해석하여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는 뜻이리라. 같은 글에서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기 시작한다”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철학의 해석 작업을 묘사하기도 했다. 시대의 진행이 마무리된 뒤에 전체의 의미를 총괄하는 것이 철학의 일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철학의 임무가 뒷정리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과 역사와 세계에 대한 총체적 사유로서 철학은 여명과 함께 기지개를 켜기도 하고 한낮의 세상을 관통하여 날기도 한다. 시대를 해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깨우기도 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 김상봉(전남대 교수)이 최근 발표한 논문 ‘한국철학의 좌표계’는 주목할 만하다. 이 논문은 ‘20세기 이래 이 땅에 한국철학이 있었느냐’는 물음에 답하고 있다. 한국철학이 있었느냐는 물음은 언뜻 어리석은 물음처럼 들린다. 20세기 내내 대학 강단에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제도로서 철학교육이 아니라, 우리의 주체적 세계관을 여는 사유의 활동으로서 철학이 있었느냐는 물음으로 바꿔보면 답은 바로 나오지 않는다. 강단철학이 바깥에서 들여온 온갖 부류의 철학지식을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을 세웠는지는 의심스럽다. 김상봉은 여기서 우리를 강단 밖으로 데려간다. 20세기에 한국철학이 있었다면, 그 철학이 태어난 곳은 ‘들판’이라는 것이다. “광야의 철학, 거리의 철학이 20세기 한국철학이었다.”
그 한국철학의 출발점이 동학이다.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19세기 서양에서 들이닥친 제국주의 해일로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가 무너지는 미증유의 충격 속에서 태어났다. 동학은 한 세계의 붕괴, 곧 파국의 자각이었으며 새 세상의 도래, 곧 개벽의 예고였다. 이 파국과 개벽의 사상을 원점으로 삼아 뻗어나간 좌표축 위에 등장한 철학자가 다석 유영모와 그 제자 함석헌이다. “한울이 곧 나이며 내가 곧 한울이다”라는 동학의 가르침은 이 두 사람에게 이어져, 역사를 만드는 민중이자 한울과 통하는 참나를 가리키는 ‘씨알’로 영글었다. 김상봉은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철학이라는 것이 가장 약한 자들의 눈물을 깊이 성찰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씨알의 철학자’ 함석헌에 이르러 비로소 그 눈물의 의미가 철학적으로 조명됐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눈물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함석헌의 이 말은 눈물 없이는 진리도 볼 수 없다는 새로운 진리를 역설한다. 함석헌은 씨알들과 함께 눈물 흘리며 20세기 내내 일제-독재-분단에 맞서 싸웠다.
김상봉이 이 논문에서 함석헌과 같은 좌표축 위에 선 철학자로 도올 김용옥을 꼽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오늘날 김용옥은 대중들에게 먼저 다가가 하나의 우는 씨알로서 말 건네는 유일한 철학자다.” 도올의 사유와 실천은 이런 평가에 값한다. 2012년 대선 때 시대의 역주를 막으려고 분투했던 도올은 얼마 전 <한겨레>에 실은 ‘세월호 참사 기고문’에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지배층의 유구한 무책임성과 반민중성을 규탄했다. 그 글은 트위터·페이스북을 타고 방방곡곡 퍼졌다. 김상봉의 말대로 철학이 “잠든 민중을 깨우는 외침”이라면 도올의 격문이 바로 씨알의 외침이고 씨알의 철학이다. 선거판에서 거짓 눈물을 짜내는 지배세력의 울음이 아니라, 낡은 시대와 싸우며 씨알들과 함께 우는 이 철학자들의 울음이야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철학의 알림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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