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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총리 자격과 이념의 극단성 / 임석규

등록 2014-06-12 18:23수정 2014-06-12 18:52

임석규 논설위원
임석규 논설위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자리이면서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가 되면 내려가는 헐렁한 현직(顯職·높고 중요한 직위)’. 작가 최일남은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실속은 없는 총리직의 속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총리직의 허울좋음을 빗댄 조어들이 많기도 하다. 축사를 대신 읽는 대독 총리, 행사에 불려다니는 의전 총리, 있는 듯 없는 듯 바지 총리, 간판만 그럴듯한 얼굴마담 총리, 가끔 대통령 대신 계란세례도 받아야 하는 방탄 총리, 그리고 대통령을 대신해 책임진다는 의미의 책임 총리….

‘실세 총리’가 없지는 않았다. 이회창은 대통령 김영삼에게 실권을 요구하며 맞선 줏대 있는 총리로 기록됐다. 이해찬은 대통령 노무현으로부터 실질적 권한을 위임받았다. 총리의 힘은 대통령의 신뢰 아니면 대통령과의 투쟁에서 나왔다. 이도 저도 아닌 총리들은 얼떨떨하게 입각해 어정쩡하게 지내다가 애매모호한 사유로 물러나기 일쑤였다.

헌법을 보면 총리의 권한이 막강하다. 장관들을 ‘거느려 다스린다’는 뜻의 행정 각부 통할권이 있고 국무위원 제청권, 해임건의권도 있다. 하려고만 들면 못할 일이 없는 자리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는 ‘책임총리’를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이 정부 대선공약인데도 말이다. 그럭저럭 시늉만 내는 총리에 자족하겠다는 선언이다.

문 후보자에게 책임총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총리직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덕목이라도 보여주길 기대할 뿐이다. 총리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은 균형감이며, 가장 큰 결격 사유는 사유의 극단성이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인물이 총리가 되는 건 불행한 일이다. 극단적 사고에 갇힌 사람은 상식과 동떨어진 판단을 내리기 쉽다. 여론을 오독해 상황을 아전인수로 곡해할 위험도 있다. 문 후보자가 언론인 시절 마구 쏘아댄 말과 글의 독화살들은 그의 극단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다. 그것들은 정파적 견강부회, 반대파에 대한 악의, 전직 대통령을 향한 모욕으로 가득 차 있다.

사상검증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가 보수, 우파라서 문제삼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그가 말과 글로 거침없이 내뿜어온 생각들의 극단적 편향성이다. 좌냐 우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판단과 선택의 문제다. 그래도 극좌, 극우는 곤란하다. 우리 사회 논쟁적 쟁점들에 대한 그의 견해는 맨 오른쪽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신념의 굳건함과 사상의 극단성은 다른 차원의 문제 아닌가. 문 후보자를 ‘극우’라고 단칼에 낙인찍고 싶지는 않다. 일방적 낙인찍기야말로 극단적 편향의 주요한 속성이기도 하다. 설사 그가 극우라 해도 전직 언론인으로서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데 반대하지 않겠다. 언론인 시절 쓴 글이고, 교회의 장로로서 한 말들이니 이해해달라는 항변도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파면 팔수록 불거지는 그의 극단적 언행은 총리라는 공적 직책과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식민지배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선 끔찍한 고통의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일본 극우파의 맥을 잇는 듯한 그의 역사관에 대해선 보수, 우파가 더욱 앞장서서 분기탱천해야 맞을 것이다. 민족이란 가치야말로 보수, 우파가 소중히 여기는 것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우파, 보수 진영에서 그런 목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다.

역대 어느 후보자보다 풍부하게 남아 있는 그의 텍스트들이 이제 본격적인 검증대에 올랐다. 청문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번 해볼 수 있는 기회다. 그가 청문회 증인석에 앉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임석규 논설위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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