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겸 논설위원
1989년 늦봄의 어느 날 고등학교 은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교조 창립대회를 보고 싶어 서울에 올라가니 앞장을 좀 서달라는 말씀이었다. 대회가 열린다던 한양대는 경찰이 겹겹이 에워싸고 교사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하고 있었다. 경찰의 눈을 피해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건국대. 참교육이라는 똑같은 열망을 품은 교사 수천명을 목격하자 은사님은 “심장이 쿵쾅거려 서 있질 못하겠다”며 털썩 주저앉으셨다. 곧이어 연세대에서 전교조 집행부가 구성됐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이미 주름이 깊게 팬 은사님의 눈가에는 소리없이 눈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25년, 전교조로 인해 지금처럼 조마조마한 적은 없었다. 세월호 아이들의 목숨과 맞바꾼 진보 교육감 때문이다. 그 소중한 싹이 법외노조를 막아보겠다는 전교조의 총력투쟁 열기에 자칫 말라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싸움은 꼬리에 꼬리를 물 태세다. 처음은 해고자 9명이 문제였지만, 이들을 구하려다 노조 전임 72명이 잘려나갈 처지다. 72명을 구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가. 법외노조라 하더라도 사무실 문제와 단체교섭 등은 교육감의 울타리 안에서 보장받을 수 있다. 조합원의 97%가 자동이체를 신청했다니 돈 문제도 해결된 셈이다. 얻을 건 적고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크다.
애초 해직자 9명을 끌어안고 가는 게 현명한 전략이었나 하는 의문마저 든다. ‘교육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해고된 동지를 어찌 버릴 수 있느냐’는 정서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전교조에 고용된 상태라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받고 있다. 아무래도 박근혜 정부의 ‘도발’에 순순히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기가 더 크게 작용했지 싶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23번 싸워 23번 다 이긴 건 몸을 사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다 따져봐서 이길 수 있는 전투에만 나섰다. 임금이 역정을 내더라도, 백성이 통곡하더라도 귀를 막았다. 비겁도 때로는 용기가 되는 법이다.
도올 김용옥은 진보 교육감 시대를 노무현 대통령 당선보다 더 역사적 의의가 큰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4년은 결코 길지 않다. 교육감과 전교조가 한 몸이 돼 경쟁교육과 특권교육의 한 귀퉁이를 허물어내는 데도 빠듯한 시간이다. 관성의 궤도를 벗어나야 한다. 진보 교육감들도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 실제로 어느 교육감의 측근은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전교조에 끌려다니는 게 아닌지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예상치 못한 승리에 고무된 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냉정하게 보자. 호남을 제외하면 득표율은 다 30%대다. 유권자들이 낡은 교육을 폐기한 건 맞으나, 새로운 교육을 신뢰하는 건 아니다. 힘에 부치는 일을 밀어붙이다 보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열린우리당이 국회 과반을 차지하자, 국가보안법 등 4대 개혁을 한꺼번에 추진하려다 급격하게 세력이 약화된 게 좋은 전례다. 거꾸로 작은 일에 지나치게 힘을 쓰다 보면 큰 걸 놓친다. 전교조는 나이스인지 네이스인지에 매달리다 정작 중요한 교육개혁은 한 발짝도 떼지 못한 경험이 있다.
지금 전교조의 경쟁 상대는 박근혜 정부가 아니다. 남은 임기 3년 반짜리를 상대로 아옹다옹하기에는 사반세기의 역사가 아깝다. 탄압을 하든 구박을 하든 교실의 학생만 보고 묵묵히 나가기 바란다. 최소한 10년, 20년을 내다보고 우리의 교육 틀을 다시 짜야 한다. 거기서 거둔 성과는 민주진보진영 전체의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아무리 둘러봐도 믿을 데라고는 교육감과 전교조밖에 없다. 건승을 기원한다.
김의겸 논설위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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