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문창극 파동’을 겪으며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단지 국민과만 소통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장차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국정 동반자가 될 총리 후보자마저도 불통의 대상이었다. 국가운영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 사전에 충분히 교감을 한 흔적도, 깊은 신뢰를 쌓은 정황도 발견하기 힘들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사퇴를 둘러싼 지루한 시간 끌기는 바로 권력 핵심 내부의 심각한 소통 부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불통의 공평함’에 힘없는 백성들은 고마워해야 할 것인가.
문 후보자의 깜짝 발탁이 이른바 ‘비선의 작품’이라는 정치권의 관측도 잘 살펴볼 대목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 정도의 대형 인사 참사가 잇따랐다면 청와대 인사위원장인 김기춘 비서실장을 문책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김 실장 의존증이 치유불능 상태에 이른 탓도 있겠지만, 혹시 김 실장이 문 후보자 발탁의 실질적 주역이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는 그를 그대로 떠안고 가는 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새누리당 안에서도 점차 비선 문제가 도마에 오르며 김 실장과 비선 라인 사이의 권력 다툼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은 유의할 대목이다.
박 대통령이 신임 국정원장·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요청안을 국회로 보낸 것이 합당한지도 의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묵과할 수 없을 만큼 도덕적으로 흠집투성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애초 청와대는 13일 개각을 발표하면서 “정홍원 총리가 문창극 총리 내정자와의 협의를 거쳐 대통령에게 제청했다”고 밝혔다. 비록 ‘편법’이긴 하지만 새 총리 후보자와 협의하는 모양새를 갖춤으로써 법적 요건의 형식과 내용을 얼기설기 맞춘 셈이다. 하지만 문 후보자가 물러난 이상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박 대통령이 정 총리를 계속 유임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장관 후보자들에 대해서도 ‘패키지 지명철회’를 해야 논리적으로 맞는다. 아니면 최소한 새 총리 후보자를 지명한 뒤 그와 다시 협의하는 모양새라도 갖춰야 옳다. 말로만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면 뭐할 것인가.
어쨌든 이제 박 대통령은 총리 발탁이라는 가시밭길에 다시 들어섰다. 생각 같아서는 총리 제도를 아예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게다가 ‘3차 시도’가 꼭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변하지 않는 한 오히려 ‘3진 아웃’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은 고작 분풀이나 하는 것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할지 모른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유병언씨 일가에 불타오르는 적개심을 보인 것처럼 이번에는 한국방송(KBS)을 향해 레이저 광선을 뿜어내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 안고 있는 본질적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또 다른 무리수로 ‘한국방송 사태’라는 짐을 추가로 떠안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미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은 표류가 아니라 거의 침몰 수준에 이르렀다. 국가개조는커녕 스스로 운신도 못하는 한심한 상황이다. 요즘 하는 모습을 보면 정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물론 관성의 법칙에 따라 정권이 그냥 어찌어찌 굴러는 갈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의 청사진은 이미 빛이 바랬고, 추진 동력은 바닥났으며, 국민의 기대도 시들해졌다. 세월호 참사의 교훈을 까마득히 잊고 지방선거 결과에 으쓱해 오만을 부린 필연적인 업보다.
박 대통령에게 권고한다. 차라리 총리 지명을 하지 말라. 지금의 ‘시한부 총리 체제’를 연장하자는 말이 아니다. 총리 지명을 그냥 국회에 한번 맡겨보라는 이야기다. 어차피 과제 해결 능력이 없는데 부여잡고 끙끙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국회 인사청문회 부담에서만 벗어나도 어디인가. 게다가 덤으로 개방과 공유라는 시대정신도 과시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 아닌가. 그런데 박 대통령이 이런 결단을 내릴 확률은? 물론 거의 없다. 그러니 앞날이 어두운 것이다. 대통령이나 국가 모두 말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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