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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김흥숙

등록 2014-07-18 18:25

김흥숙 시인
김흥숙 시인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세월호가 4월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지 백일이 되어 가지만 원인조차 밝히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 고철 같은 배를 사들여와 무법적으로 운행한 회사 대표를 아직 잡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고, 마지막 실종자가 발견된 지 24일 만에야 한 구를 수습한 것도 이상하고, 국회의원들이 국정조사를 하는데 사건과 관련된 새로운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합니다.

이 나라의 미래가 암울해 보이는 건 권력자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장관을 시킵니다. 세월호 사건 때 구조에 바쁜 해경 헬기를 타고 진도로 갔던 해양수산부 장관은 팽목항에서 수염을 기르며 유임되었는데, ‘바른말 하는 장관’으로 알려진 유진룡씨는 후임이 결정되기도 전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서 면직되었습니다. 마침 문체부 제1차관 자리도 공석인데 뭐가 그리 급했을까요?

국회의원들은 시간 낭비의 달인들입니다. 지금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청와대와 싸우는 것이지만, 국회의원들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을 치른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대학에 특례입학 시키자며 정원의 1퍼센트를 특례입학 시킬 것인가 3퍼센트로 할 것인가 자기들끼리 다투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보도자료까지 내어 대학 특례입학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겠습니까?

청와대는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가 요청한 자료 205건 중 단 7건만 제출했다고 하니 청와대가 국회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욕을 당했으면 국회의원 300명이 모두 청와대로 몰려가 시위를 벌여야 할 텐데 국회의원들은 가만히 청와대가 장관으로 불러주지나 않을까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의 요체라 하지만, 이제 이 말은 코웃음을 부르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입법, 행정, 사법부가 권력과 역할을 나누어 갖고 상호간에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하여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막는 ‘삼권분립’ 대신 대통령이 대표하는 행정부가 나머지 두 부서를 거느리는 ‘삼권불립’(三權不立)이 자리를 잡아가니까요.

참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은 국회에서 노숙하며 농성하고,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단원고 학생들은 안산의 학교에서 여의도의 국회까지 뙤약볕 아래 도보행진을 하며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유가족들은 ‘4·16 참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자고 하지만, 정부와 새누리당은 위원회는 구성하되 수사권과 기소권은 부여하지 말자고 하니 진실이 밝혀지는 게 두려운 걸까요?

지난 5월 국회에서 정홍원 국무총리는 청해진해운이 사고 당일 국가정보원에 세월호 사고를 보고했다고 인정했지만, 우리는 아직 왜 그 사고를 해경에 보고하기 전에 국정원에 보고했는지, 보고를 받은 국정원이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세월호 사건, 지오피 총기 사건, 4대강의 오염, 재앙을 예고하는 잠실 제2롯데월드…. 수수께끼가 늘어날수록 분노와 절망도 자랍니다.

엊그제는 제헌절이었지만 태극기를 걸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헌법이 처음 제정, 공포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삼권분립’이란 말처럼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데, 국민인 우리는 조국이 자꾸 낯설어집니다. 삭막한 거리엔 무궁화가 어여쁘지만 봄마다 벚꽃 개화를 외치던 언론은 무궁화의 개화엔 입을 열지 않습니다.

김흥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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