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가끔 수업시간에 농담처럼 건넨다. “아마 무작위 추첨제로 부부를 짝짓는다 해도 잘 살 확률은 비슷할걸요?” 이른바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중매결혼이 연애결혼보다 한결 나으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비슷한 집안에 비슷한 형편, 나이와 직업과 외모, 거기다 빼꼼한 가치관 설문조사라도 곁들인다면 매혼(媒婚)은 더더구나 성공적인 방책이 되리라. 그럼에도 100년 전쯤 열풍 속에 점화된 연애-결혼이라는 짝은 채 다 식지 않았다.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는 계산속이 어지간히 퍼진 가운데서도 젊은이들은 여전히 연애에 골몰한다.
건너다보기로 연애 풍속은 많이 달라졌다. 100일 기념, 1주년 기념이 등장하더니, 요즘은 사귄 지 한달 기념까지 예사일 정도로 수선스럽다. 감정에 비해 관계가 과잉이라고 해야 하나. 짝사랑이란 게 관계를 앞질러 버린 감정의 초과라면, 언제 끝날지 모르니 그 전에 누릴 것 다 해보자는 식 요즘 풍속은 감정에 앞서 자생하는 이벤트의 승리다. 회혼(回婚)이나 금혼(金婚) 정도 돼야 첫 결연을 축하할 수 있었던 그 옛날에 비하면 시간을 몇십배, 몇백배 빨리 당겨쓰는 셈이다. 가끔 딱하다. 절대 너랑 1년, 10년, 게다가 그 이상 갈 리 없지, 미리 불신하고 냉소하는 모습을 보는 듯싶어서.
연애를 통한 감정과 관계의 학습이 꽤 쏠쏠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연스레 “연애도 많이 해보고”류의 말도 입 밖에 잘 낸다. 감정의 절정과 바닥, 관계의 최선과 최악 등을 연애만큼 다양하게 또 노골적으로 겪게 해주는 경험은 별반 없다. 대체 왜 누구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연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지 공부하는 데도 연애는 좋은 교과서다.
민주주의와 자유연애는 대체로 동시대적이다. 책임의 구조가 흡사하기 때문이리라. 남에게 의뢰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그 구조는 생각할 때마다 경이롭다. 만인이 선택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역사상 그렇듯 많은 배신과 절망의 증거가 있었건만 그래도 ‘모든’ 인간에게 기대다니. 만인이 지혜로워지길 기대해선 안 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분명 우리 힘으로 민주주의에 도달해 있다. 다수결로 당선된 대통령의 통치에 승복하기 어렵다거나, 대의제 민주정 자체를 회의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사랑에 있어서건 정치에 있어서건 냉소주의가 번져가는 것은 슬프다. 짝사랑을 노래한 하이네의 그 많은 시가 시대로부터 소외된 산물이었다고 하나, 짝사랑의 결핍은 더 큰 소외의 증거 같다. ‘모든 게 민주화되지 않았기 때문’, 그런 식의 결핍을 결핍하고 있는 세태가 더 살아내기 어려울 때도 있긴 하다. “내 마음의 깊은 상처를/ 고운 꽃이 알기만 한다면/ 내 아픔을 달래기 위해/ 함께 눈물을 흘려주련만.” 허나 그때도 다 알지 않았는가. ‘고운 꽃’은 내가 “그대는 꽃과 같아라”라고 명명하는 순간 태어난다는 것을.
나의 ‘고운 꽃’은 당신의 ‘고운 꽃’이 아니다. 그때의 ‘고운 꽃’은 지금의 ‘고운 꽃’이 아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감수하면서도 ‘꽃’을 놓치지 않으려면 아직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한가 보다. 각자 제 삶과 선택으로써 함께 산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가 보다. 감정을, 관계를, 배우면서 연애한다는 게 쉽지 않은가 보다. 사랑할 때 사랑하고 분노할 때 분노하기가 이토록 지난한가 보다. 하이네는 “난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하지 않는다”고 되풀이한다. 아마도 살아내기 위해.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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