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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찜질방의 맛 / 권보드래

등록 2014-08-29 18:20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여러 해 전 찜질방에 처음 가 보곤 아연실색했다. 이건 마치 돈 내고 골목길에 나앉은 꼴이잖아! 한국인의 연면한 골목 사랑에 감탄하긴 했지만, 내 식구끼리 오붓한 내 집 두고 수십명이 무더기무더기 누워 있는 그곳에 갈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찜질방을 잊고 살았다.

올여름 오랜만에 찜질방에 갔다. 한 번 가보곤 재미나서 또 갔다. 핑계는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다는 것이었지만, 매트에 벌렁 드러누워 만화책 보는 재미가 더 좋더라. <호문쿨루스>도 보고 <영혼의 안내자>도 읽고 <모카커피 마시기>를 복습하고 <오디션>도 만지작거려 본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만화책인데, 책 대신 웹툰이 대세가 되면서 내가 너무 신의를 지키지 못했지, 암. 영어책씩이나 끼고 갔지만 한두 쪽 읽곤 팽개쳐둔 채다.

진지하게 수험서를 들여다보는 젊은 부부도 있긴 하나 찜질방 분위기는 난만하다. 누워 잠들고 엎드려 스마트폰에 매달리고 안마의자 위에서 꾸벅꾸벅 존다. 구석 노래방에서 어울리잖게 백지영 노래를 열창하고 운동기구실에선 중년 몇이 맨발로 러닝머신 위를 걷는다. 기 쓰고 살던 맥이 풀린다. 난데없이 그 사람들을 껴안고 싶은 친근감을 느낀다. 아아 이 찌질함이라니, 아 이 평안함이라니.

곁에선 내 새끼들도 낄낄대며 만화책을 본다. “뭐 그런 걸 보노.” 남편이 한심하다는 표정이지만 지금은 괜찮다. 수험서에 밑줄 긋는 옆자리 부부를 보면서도 태평하다. 다 똑같은 찜질복을 입고 삶은 계란을 까는 이웃들이 정겨울 뿐이다. 어쩐지 쿨하고 시크해야 할 것 같은 카페의 과시적 분위기와 이 공기는 얼마나 다른가. 여기서라면 육아에서도 좀 불량해져도 될 것 같다. 애들은 어느새 컴퓨터방을 기웃거리며 이용 가능 시간이 남아 있는 컴퓨터를 탐색 중이다.

갈수록 개그 프로가 좋아지더라니. 티브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개그 프로가 스쳐가면 눈길이 간다. 예전엔 한두 코너가 재미없으면 자리를 떴는데 이제 다음 건 재밌겠지, 기다려 본다. 개그맨 중 어떤 이들에 대해 거의 사표 삼고 싶어지는 경탄을 느낀다. 자기풍자를 중요한 가락으로 하는 그 세계가 자주 뭉클해진다. 전 이런 사람입니다만. 키 작고 뚱뚱하고 못났습니다만. 뾰족하게 똑똑하지도 못합니다만. 내가 못마땅해 힘들 때도 있지만 어쩌겠습니까. 나 자신인 채 살아 봐야지요.

티브이 앞 웃음소리를 지나 한증막에도 가 본다. 다들 가마니 덮어쓰고 묵언수행 중이다. 하악. 뭣들을 참고 계신가요. 물어보면 노폐물 뽑고 살 빼기 위해서라고 답할 그 사람들이, 그러나 잠깐 동안은 경건한 수도자 같다. 1초 1분을 더 견뎌내면서 조용히 땀을 흘린다. 하악하악. 참는다는 사실 자체의 쾌미를 2분, 3분… 채 헤아리지 못하고 먼저 뺑소니치고 만다. 멧돼지, 멧돼지를 쫓아야 하는데. 몇 달 전 일이다.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에 길 잃은 멧돼지가 나타났는데 놀던 아이들이 와와 몰려가 쫓아버리고 말았다나. 가만, 저기 스마트폰 게임에 한창인 초등학생들이 혹시 그때 그 녀석들이려나?

남편은 자고, 만화 덕분에 애들은 조용하고, 소르르 졸음이 온다. 홀가분하다. 미모마저 평준화되고 여긴 참 좋구나. 보잘것없어도 편하구나. 옆자리 사람들과 한바탕 수다라도 붙으면 그야말로 옛날 골목길 풍경이겠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더니. 그리곤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애들이 배고프다며 잡아 흔든다. 그래, 얘들아, 라면 먹으러 가자. 오늘치 피서는 이제 끝이다.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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