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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윗물, 아랫물 / 호인수

등록 2014-09-26 18:37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지난번에 쓴 <한겨레> 칼럼 ‘교황 효과를 기대한다’를 읽고 친구가 전화했다. “윗물은 맑은데 중간물이 지저분하니 아랫물이 깨끗할 리가 있나?” 교황은 맑은데 그 아래 주교가 흐리고 더 아래 사제들이 탁하니 맨 밑바닥의 신자들이 깨끗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이다. 윗물은 맑은데 중간물이 흐린 것이 논리적으로는 잘 설명이 안 되지만 엄연한 사실인 걸 어쩌랴. 도대체 윗물과 중간물 사이에 어떤 오물들이 어떻게 스며들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아랫물의 처지에서 올려다볼 때는 중간물도 다 윗물이다. 지금 한국 천주교회의 여러 교구들은 지역별로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실제로 교구의 최고 책임자는 교황이라기보다는 교구장(주교)이다. 교황은 추기경들이 선출하지만 주교는 교황이 임명한다. 교구장, 주교는 교구의 사제 인사권과 경제권을 포함한 모든 결재권을 두루 한 손에 쥐고 있으니 그 권한이 막강하다. 정년 말고는 임기도 없다. 주교회의는 주교들의 협의기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개별 교구에 대한 구속력이 없다. 한국 교회에서 주교를 관리감독하거나 탄핵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사제는 주교의 명을 받아 수행하는 한낱 대리인일 뿐이다.

언제부턴가 천주교회 안에서도 일부 성직자들이 돈을 너무 밝힌다, 권위주의가 심하다, 독선이 도를 넘는다는 비판이 조심스럽게 일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내놓고 말을 해도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변명하려 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그래도 아직은…”이 고작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새삼스럽게 들춰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충정일 게다. 유럽이나 북·남미 교회를 체험해본 사제나 수도자, 평신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는 우리나라만큼 목에 힘을 주고 군림하는 주교와, 부족함 없이 풍족하고 편하게 사는 사제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윗물이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깨끗한 아랫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선가? 우리나라도 갈수록 성직자 지망생이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심각하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신학교 관계자들의 말이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것은 지원자 수 감소가 아니라 점점 더 떨어지는 그들의 질적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기보다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젊은이들의 불안이 빚어낸 궁여지책으로 본다면 성직에 대한 모독이요 불경일까? 우리나라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거듭 당부한 교황의 발언들을 곱씹어보면 그는 방한 전에 이미 한국 교회의 사정과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대통령이 무슨 잘못이냐, 다 아랫놈들 탓이지”라는 말에 나는 절대로 동조할 수 없다. 그 ‘아랫놈’을 발탁해서 권력을 부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윗분’이기 때문이다. 어찌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교회도 결코 다르지 않다. 모든 게 사람일이다, 사람 사는 사회는 어디든 똑같다, 라고 합리화하거나 적당히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교회의 웃어른들께 읍소한다. 제발 북악산 밑 구중궁궐에서 독야청청하는 대통령을 부러워하거나 흉내 내려 애쓰지 마시라. 그거야말로 온 강물을 통째로 오염시킬 독극물이다. 혹시 잠깐 한눈을 팔았다면 서둘러 제 길로 돌아오시라. 귀를 열고 발품을 파시라. 교황이 일부러 수만리를 날아와 가난한 중생을 보듬는 시범을 보였으니 더는 망설이지 말고 그저 본 대로 따라만 하시면 된다. 교회는 물론 한반도의 강마다 맑은 물이 철철 넘쳐흐를 것이다.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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