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갈라파고스 현상’은 세계적 기준을 외면한 채 자신만의 기준을 고집하다 낭패를 겪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대륙에서 떨어져 고유한 생태계를 유지하다 멸종 위기를 맞은 갈라파고스 제도에 빗댄 용어다. 그런 모습을 한국의 사법 현실에서 본다.
검찰은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 발언이 도를 넘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직후 인터넷 허위사실 유포를 엄단할 전담팀을 발족했다. ‘공적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이 우선 수사 대상이라고 한다. 앞서 검찰은 8월 초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에 명예훼손사건 전담팀을 설치했다. 이 팀이 먼저 손을 댄 사건이 세월호 침몰 당일 ‘대통령의 7시간’을 두고 선정적 의혹을 제기한 일본 <산케이신문> 보도였다. 주문 즉시 맞춤 서비스 같다. 최고권력자 한 사람을 위해 사법권력이 작동하는 꼴이니 다른 나라에선 찾기 힘든 전근대적 시대착오다.
시대착오는 ‘글로벌 스탠더드’도 무시한다. 허위사실 유포 자체에 대한 형사처벌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선 없는 일이다. 미네르바 사건으로 부활한 한국의 전기통신기본법도 2010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됐다. 검찰은 대신 명예훼손죄를 적용하겠다지만, 형사상 명예훼손 역시 많은 나라에서 쓰이지 않는다. 국제 언론자유 수호단체인 ‘아티클19’ 조사로는 2005년 1월부터 20개월 동안 세계 158개국에서 명예훼손죄로 투옥된 사람은 146명뿐이었다. 일본·스페인·러시아를 제외하곤 대부분 개발도상국이다. 미국에선 50개 주 가운데 15개 주만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을 두고 있을 뿐인데, 그나마 사건은 전국적으로 연간 2건뿐이다. 유엔이나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미주기구(OAS) 등이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 폐지를 권고해왔고, 실제로도 폐지가 잇따른다. 권력자를 위해 명예훼손죄가 악용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도 검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역주행이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사건도 국제 표준에 맞지 않는다. 헌법 분야에서 유엔과 같은 기구라는 ‘베니스위원회’는 “정당 해산 제도는 ‘실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공통된 접근법”(2009년 ‘정당의 금지에 관한 터키 헌법 및 법률 규정에 관한 의견서’), 즉 원칙이라고 밝혔다. “민주적 헌법질서 전복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거나 폭력 사용을 주장하는 정당에만” 예외적으로 적용할 수 있지만, 그때도 “구성원의 개별적 행위에 대해 전체로서의 정당에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2000년 ‘정당의 금지와 해산 및 유사조치에 관한 지침’)고 못박고 있다. “덜 과격한 다른 조처로 위험을 예방할 수 있는 경우에는 정당 해산 결정이 내려져선 안 된다”(2010년 ‘정당 규제에 관한 지침’)는 지침도 있다. 통합진보당 사건을 이들 지침에 맞춰보면 하나하나 다 어긋난다. 그런 사건을 붙잡고 있는 채로 서울에서 세계헌법재판회의 총회를 열었으니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진작 제동이 걸렸어야 했다. 시대와 원칙에 맞지 않게 함부로 법률을 들이대면 법치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진언을 누군가 했어야 했다. 인터넷까지 감시하면 정보통신산업이 타격을 받는다고 말리는 사람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의 누구도 그러지 않은 듯하다. 그런 일을 해야 할 사람에는 검찰총장도 있겠지만, 정작 총장은 보이지 않는다. 제 일도 아닌 유병언 체포에 내몰린 인천지검을 위문방문한 모습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윗분의 뜻을 받들어”를 앞세운 법률전문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을 좇아 ‘뜻을 받들기’만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라고 그 자리에들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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