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빈 논설위원
“그동안 한국 경제가 이룬 성공 방정식은 한계에 이르렀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9월 중순에 경기도 판교 테크노밸리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 말이다. 최 부총리가 취임 뒤 늘 해온 주장이기도 하다. 대내외 여건의 변화로 이제는 경제 운용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성공 방정식의 답은 창조경제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창조경제는 명쾌한 답이 될 수 없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는 뚜렷한 실체나 개념이 없다. 기존 정부에서 해오던 정책들을 그럴싸하게 새로 포장한 구호일 뿐이다. 오죽하면 정책 담당자들조차 사석에선 “창조경제가 창조적이지 않은 건 사실”이라고 실토할 정도다. 최 부총리는 조금 다르다. ‘그동안 규제개혁장관회의, 무역투자진흥회의를 통해 마련한 대책들’을 창조경제의 실체적 내용이라고 소개했다. 최 부총리의 풀이가 맞다면 창조경제는 이름을 바꿔야 한다. 그동안 두 회의에서 나온 대책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이명박 정부 때의 정책과 맥이 닿아 있다. 규제완화 등 모양만 조금 바꾼 ‘엠비노믹스’의 복사판들이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내년 예산안에서도 경제정책의 낡은 방정식이 잘 드러난다. 내년 총지출 예산은 376조원으로 올해보다 5.7%(20조2000억원) 늘었다. 정부는 확장적 재정정책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리 보기 어렵다. 재정지출 증가율은 정부가 내놓은 내년 명목성장률 예상치(6.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재정의 성장기여도가 내년에는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정부의 정책 의지로 조정할 수 있는 ‘재량지출’ 예산안의 분야별 증감 내용을 보면 더 의아하다. 개발주의 시대의 재정운용 기조가 되살아난 느낌마저 든다. 신설되거나 지난해보다 증가한 예산의 절반 이상이 건설투자나 산업 지원용이다. 애초 내년부터 2017년까지 11조6000억원을 축소하기로 한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은 7000억원이 증가한 24조4000억원으로 책정됐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17.9%(2조2000억원)나 늘렸다는 안전예산(14조6000억원)도 내용을 뜯어보면 도로 개보수 등 국민 안전과 직결되지 않는 항목이 많다. ‘모양내기’ 또는 ‘부풀리기’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러다 보니 135조원에 이르는 박 대통령의 공약가계부 이행은 곳곳에서 차질을 빚게 됐다. 예컨대 3조1000억원을 투입하는 고교 무상교육은 감감무소식이다.
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 “창조경제를 위해서는 복지와 경제민주화가 꼭 이뤄져야 한다”고 자주 강조했다. 이런 논리에 대해 대선 두어달 전쯤에는 당내 일부에서 강하게 이견이 제기되며 극심한 갈등이 일기도 했다. 그러자 박 후보는 한 당원 행사에 참석해 “당내 갈등을 전화위기의 계기로 삼아 미래로 나아가자”고 웅변해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재앙을 복으로 바꾼다는 뜻인 전화위복에서 ‘복’을 ‘기’라고 한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다들 무심코 나온 말실수겠지 하고 웃어 넘겼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뒤 지금까지 박근혜 정부의 대응 방식을 목도하면서, 전화위기는 실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으킬 기(起)를 넣으면 그럭저럭 지금 상황과 맞는 사자성어가 된다.
오늘로 세월호 참사 172일째를 맞는다. 국민들 기억 속의 세월호가 날이 갈수록 점차 희미해지면서 충격도 점차 가라앉는 듯하다. 그러는 사이 박근혜 정부는 재정을 마중물로 하여 집값 올리고 지역개발 등을 확장해 성장률 끌어올리는 데 골몰하고 있다. 이럭저럭 세월호 참사가 정치적 전화위기의 방정식에 녹아든 느낌이다.
박순빈 논설위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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