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지금 머물고 있는 스페인 말라가의 숙소 침실에는 ‘피에타’가 걸려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피에타가 정면 사진이었다면 이 사진은 조금 왼쪽에서 찍어 예수의 얼굴과 마리아의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숙소에 도착해 여장을 풀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도 피에타였다. 함께 온 큰애도 그 사진이 마음에 걸렸는지 침실 분위기치고는 좀 무겁다고 했다. 집 안 곳곳에 밀레의 그림 복사본을 비롯해 화가를 알 수 없는 크고작은 그림들이 많았다. 침실 그림으로는 늙은 호박과 마늘, 접시를 그린 정물화가 더 낫지 않았을까.
도심에 위치한 탓에 숙소 주변은 늘 시끄럽다. 저녁이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새벽 한 시 무렵이면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한다. 밤새 술을 마시고 떠들던 젊은이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새벽 다섯 시 무렵이면 청소차가 도착하고 곧 물청소가 시작된다. 창가에 서서 하얀 세제 거품이 둥둥 뜬 물이 경사지를 따라 밀려 내려오는 것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밤마다 잠에서 깨는 건 통증 때문이었다. 낮이면 참을만하다가도 깊은 밤이면 뭉근하고 기분 나쁜 통증에 눈이 떠졌다. 스페인 청년들의 고성에 잠이 완전히 달아나면 거리의 불빛에 윤곽이 검게 남아 있는 피에타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느 밤 병원 복도를 걸으며 듣던 환자들의 신음 소리와 얼마 전 광화문에서 만난 한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밤이면 더욱 견디기가 힘들어요.”
누구의 엄마라는 말도 미처 하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의 엄마는 낮이면 그럭저럭 지내다가도 밤이 되면 너무도 힘이 든다며 맛을 잇지 못했다. 현관문을 벌컥 열면서 “엄마! 배고파!”라고 소리치며 들어오는 아이의 목소리가 생생한데 그 아이는 이제 돌아오지 못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피에타 위에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죽은 예수를 끌어안은 마리아. 단단한 대리석 위로 배어나오는 슬픔과 고통. 예닐곱 살 무렵 그 사진이 들어 있는 화집을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뒤로 나는 그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한글을 떼고도 피에타라는 단어는 너무도 낯설어 간혹 “피가 타”라고 잘못 부르곤 했는데 어느 순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몸속의 피가 다 타버릴 듯한 고통, 그 고통이 차가운 대리석의 질감과 충돌하며 묘한 느낌이 들곤 했다.
그날 나는 광화문 건널목에서 세월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무심히 그곳을 지나치는 이들을 보았다. 누군가 세월호에 관한 인쇄물을 내밀었지만 눈짓만으로 거부하는 이도 있었다. 할 만큼 하지 않았나,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는 책망의 눈빛도 보았다. 나는 그들의 무관심과 그사이 아무렇지도 않게 된 내성이 두려웠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단 하나의 목표로 아이들을 재우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가르친, 나는 정말 일말의 잘못이 없는 것일까. 혹시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닐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뜻의 피에타. 누가 이 사진을 침실에 걸어두었는지 모르겠다.
역사 속에는 130명의 아이들이 한날한시에 사라진 기록이 있다. 바로 전설로 내려오는 피리 부는 사나이다. 아이들이 사라진 거리에서 어머니들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 뒤로 예수 탄생 이후 1년 2년 햇수를 헤아리듯, 하멜른 시 사람들은 그 사건으로부터 1년 2년 햇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10월8일, 한국 시간으로는 그날로부터 176일, 이곳 시간으로는 175일째 되는 날이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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