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빈 논설위원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이 궁지에 몰렸다. 2012년 12월 아베 총리 취임 뒤 추진해온 경기부양책, 즉 아베노믹스가 휘청거리는 탓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일본발 금융위기’ 등 섬뜩한 예언까지 나온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최근 낸 일본 경제보고서에서 “아베노믹스에 심판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며 비극을 예고했다.
사실 골드만삭스와 같은 거대 다국적 금융회사들은 그동안 아베노믹스의 든든한 지지세력이었다. 아베 총리를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재무상을 지낸 다카하시 고레키요에 비유하며 ‘경제 구세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다카하시 재무상은 1930년대 미국발 대공황의 충격으로 일본 경제가 침몰 위기에 놓이자 과감한 금리 인하와 통화 팽창, 재정지출 확대를 추진했다. 또 금본위제 탈피를 선언하며 엔화 가치를 40%나 끌어내렸다. 그 결과 당시 일본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대공황의 충격에서 벗어났다. 기대 섞인 지지세력들은 80여년 전 다카하시 재무상이 펼친 과감한 재정·통화정책을 아베노믹스의 원형으로 본 것이다.
일본 정부는 아베노믹스의 정책 수단을 ‘세 개의 화살’로 표현한다. 경기 회복 효과가 충분할 만큼 재정지출을 확대하며 물가상승률 2% 목표로 통화량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늘리는 게 첫 번째와 두 번째 화살이다. 또 전 산업에 걸친 규제 완화와 투자 촉진으로 잠재성장률을 2%대로 끌어올린다는 게 마지막 세 번째 화살이다. 아마리 아키라 일본 경제재정상은 지난해 6월 “세 개의 화살이 큰 장작더미처럼 앞으로 일본 경제를 활활 타오르게 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세 개의 화살은 젖은 장작처럼 너무 일찍 꺼져 버렸다. 올해 1분기까지는 그럭저럭 버티다가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기준 성장률은 연율 기준으로 -7.1%로 추락했다. 4월 소비세 인상 이후 민간소비가 19%나 감소한 충격이 컸다. 더 충격적인 성적표는 무역수지다. 아베 정권 출범 뒤 미국 달러화에 대한 엔화 가치가 20%나 떨어졌는데도 27개월째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의 회계연도 기준으로 올해 상반기(4~9월) 무역수지 적자액은 5조4270억엔으로, 통계 작성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골드만삭스는 “일본 수출산업의 경쟁 여건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엔화 약세가 지속되더라도 수출 증대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수입물가 상승으로 소비자물가를 자극하고 기업에 원가 상승 압력은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일본 소비자물가는 하반기 들어 3%대로 치솟아 실질임금을 마이너스 상태로 빠뜨렸다.
아베노믹스가 목표한 대로 저물가와 저환율(엔화 강세)을 벗어났는데도 일본의 민간소비와 기업의 투자는 늘어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제는 쏠 수 있는 화살도 없다. 정책금리는 이미 0%여서 더 내릴 공간이 없고, 재정은 국내총생산의 240%를 넘어선 국가부채 때문에 파탄 직전이다.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20년’에서 벗어나겠다며 몸부림치다 이제는 정책수단까지 고갈되는 바람에 옴짝달싹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 100일째를 맞았다. 최 부총리는 우리 경제도 일본처럼 저성장·저물가의 장기화에 따른 축소 균형의 덫에 빠질 위기에 놓였다며 전례 없이 과감한 재정·통화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정책을 ‘한국판 아베노믹스’라고 평가한다. 최경환 경제팀이 ‘지도에 없는 길’을 찾다가 자칫 길을 잃고 진짜 덫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박순빈 논설위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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