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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문 앞에서 / 권보드래

등록 2014-10-31 18:28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시내로 외출하기가 겁난다. 나부끼는 깃발들. 그 불행과 분노와 갈망 사이를 걷다 보면 쉽게 지쳐버린다. 그것이 언제 내게 감염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공동성을 일깨우기보다 불안을 증식시킨다. 서명을 하거나 모금함에 돈을 넣거나 멈춰서고 참여하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충분히 천천히 걷는다. 깃발 위의 글자들을 시간 들여 읽는다. 제발 언젠가 내 일과 내 집에만 충실해도 마음이 충만한 때가 오기를 기원해 본다.

일과 집이라.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면서 가족이 얼마나 부조리한 제도인가 생각한다. 길을 건너면서 별 대안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 신호에서 다시, 어떤 부모 아래서 태어났는지가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결정하는지 생각해 본다. 유전자 문제를 치지 않는다 해도, 5할? 6할?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 듬뿍 사랑받으며 복되게 큰다. 다른 이는 세상 모든 화풀이를 자식에게 해대는 부모를 만나 두려움과 슬픔으로 얼룩진 유년기를 보낸다.

사회적 공동성이 약해질수록 부모의 지배력은 커진다. 가족과 사유재산과 국가의 기원이 같았구나 고개를 주억거렸던, 계급 너머나 국가 너머 못지않게 가족 너머를 상상했던 그 시절은 갈수록 희미하다. 대신 독신의 증가나 출산의 기피 등이 가족제도를 약화시키고 있지만 반동력도 그만큼 강력해지는 중이다. 부시 대통령 시절 미국에서 ‘가족의 가치’라는 구호가 몹시도 떠들썩하더니, 지금 한국은 모든 문제를 가족에 전가하고 말 기세다.

밖에서 파는 음식을 믿을 수 없어─ 집밥이야, 집밥. 정성 어린 밥을 먹어야 건강하게 큰다더라. 유기농 식품 싸게 파는 가게 알려줄까? 아이가 자꾸 티브이만 보고 스마트폰에만 매달리는데─ 티브이 치우는 게 유행이라니까. 밤마다 한두 시간씩 책을 읽어줘. 책 읽는 부모 아래서라야 책 읽는 아이가 자라난다며? 학교를 어떻게 믿는담─ 못 믿지, 소문난 학원을 알아보고 입시전략을 잘 짜. 그렇다고 너무 몰아치면 안 되는 건 알지?

전형적인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는 데 드는 에너지는 막대하다. 이 삶을 유지하느라 어찌나 녹초가 되는지, 요즘은 중산층 육성이 곧 건강한 시민의 형성으로 이어진다는 전제 자체가 미심쩍을 지경이다. 중산층에 도달하느라, 또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느라 다 소진된 사람들이 과연 ‘시민’일 수 있을까? 그나마 남는 돈과 시간과 에너지는 사소한 쾌락을 탐하는 데 쓰는 게 당연한 사이클인데. 이런 구조 속에서는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부터 거의 불가능한 난제가 아닌가?

중산층의, 중산층스런 지옥은 목하 번성 중이다. 차라리 행복한 중산층이 되겠노라고 오래전에 다짐했건만, 그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 아닌지 점점 의심하게 된다. 문 닫아걸어 눈보라 치는 바깥을 잊어버리고 따뜻하게 벽난로를 피우겠다고? 눈보라가 거셀수록 장작을 더 때고 난로에 더 가까이 모여들자고? 가끔 더듬는 시선으로 창밖을 힐끔거린다. 그러나 문 열어 바깥공기를 들이거나 집 밖으로 걸어나가긴 두렵다. 조심해라, 이마저 순식간에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다같이 중산층’인 시대가 오는가 했는데 삶은 더 불안정하다. 어느 부모 밑에 태어나느냐가 인생 태반을 결정하는 부조리는 그대로고, 저마다 문을 닫아건 집은 사소한 재앙에도 덜컹거린다. 아마 다 절감하고 있으리라. 사회적 공동성과 복합성을 함께 늘리는 것 외에 길은 달리 없으리란 것을.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생로병사마저 한결 견디기 쉬우리라는 것을. 허나 오늘도 내 손은 문고리 달그락거리다 만다. 어쩌면 문은 잠기지도 않았을 텐데.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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