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논설위원
“이런 안팎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우리 경제는 장기불황이라는 기나긴 고통에 빠져들게 되어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경제가 도약하느냐 정체하느냐의 갈림길에서 경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에서 한 말이다. 이날 ‘경제’란 말을 59차례나 들먹인 것에서 보듯 박 대통령의 주된 관심사는 ‘경제 살리기’다. 앞서 6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지금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경제 살리기에 우선할 수 없습니다”라고까지 했다. 박 대통령의 조바심이 느껴진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이끄는 부양정책의 약발이 신통치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박 대통령의 경제 우선주의에 공감할 수 없다. 경제분야 말고도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현안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관점에 문제가 많으니 말이다. 여전히 성장 중심의 사고에 치우쳐 분배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가 대통령 후보 시절 “지금은 성장의 과실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성장잠재력을 해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2012.12.16)라고 한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박 대통령의 ‘분배 경시’는 취임 이후 행적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는데도 사실상 나몰라라다. 특히 그가 ‘불평등’이란 말을 입에 올린 것은 딱 한차례뿐이다.(청와대 누리집) “세계지식포럼 사전행사에서 소득불평등 확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 교수가 강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달 매일경제신문사가 연 행사에서 한 얘기로, 불평등을 언급했다는 사실 말고 특별한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지나가는 김에 그냥 한마디 한 정도다. 연구 논문이나 국회 국정감사, 언론 보도를 통해 한국의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잇따랐지만 박 대통령에겐 관심사가 아닌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대신 ‘소득불균형’이란 말을 세 차례 했다. 올해 초 스위스 세계경제포럼에서다. “저는 창조경제가 지금 세계가 안고 있는 저성장과 실업, 소득불균형이란 3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등의 발언이 그것이다. 잘 알다시피 소득불균형은 소득불평등에 견줘 현상의 본질을 드러내기에 힘이 크게 달리는 용어다. 그런데 두 말을 합쳐도 분배 문제와 관련한 박 대통령의 언급은 네 차례뿐이다. 이런 상황이니 불평등 해소를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싶다.
박 대통령의 이런 모습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대비가 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계층이동과 불평등을 주제로 한 연설에서 구체적 수치와 논거를 대며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오바마는 “불평등 확대와 계층이동 감소가 맞물린 (이런) 추세는 아메리칸드림에 근본적 위협이 되고 있다. … 한 연구는 불평등이 심한 국가일수록 성장이 무르고 경기침체가 잦다는 것을 보여준다. … 불평등 확대와 계층이동 감소는 가정과 사회 결속에도 해가 된다. … 불평등 확대와 계층이동 감소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이 우리보다 더 불평등하고 오바마가 민주당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메시지가 담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 대통령도 불평등 현상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불평등이 ‘에비’면 되겠는가.
이경 논설위원 jae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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