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미친 후아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건 마드리드 오페라하우스의 이사벨 1세의 동상을 지날 때였다. 흥미로웠다. 그녀에게는 다섯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중 셋째가 바로 후아나였다. 한국문화원의 한국문학 행사차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때여서 오페라하우스 앞을 지날 때 사방은 어두워졌다. 이사벨의 동상은 겨우 윤곽만 보였다.
후아나의 남편인 펠리페 공은 인물이 출중해 ‘미남공’으로 불리었다. 바람기가 심한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는 후아나의 바람은 나중에 편집증적으로 변했다. 그런 남편이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급사하고 마는데, 후아나는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은 채 시체와 함께 지냈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후아나’로 불렀다.
다음날 짬을 내 들른 프라도 미술관에서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의 초상화를 보았다. 그가 바로 후아나의 아들로 나중에 자신의 어머니인 후아나를 추방한 인물이다. 후아나는 성안에 갇힌 채 여생을 보냈다.
오래전부터 프라도 미술관에 오고 싶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화집을 선물받은 뒤로 그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가끔 그림 속의 마르가리타 공주의 드레스를 흉내 내 그려보기도 했다. 과연 ‘시녀들’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가이드를 중심으로 단체관람을 하는 이들을 피해 자리를 옮겨가며 ‘시녀들’을 보면서 나는 어릴 적 받은 감동을 찾아내려 애쓰는 자신을 보았다.
이런저런 그림들을 지나치다가 문 위에 걸린 한 폭의 그림을 보았다. 황량한 바람이 부는 벌판, 불을 쬐고 있는 시녀들. 고급스러운 검은 관과 그 앞에 선 검은 상복의 미망인. 별 기대 없이 올려다본 그림 속, 미망인의 표정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전날 저녁 우리에게 후아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이가 말했다. “바로 후아나입니다.”
그녀는 어제저녁 우리가 잠깐 가십거리로 나눈 이야기 속의 그 여자가 아니었다. 남편의 사랑을 붙잡기 위해 기행을 일삼고 나중에는 시신으로나마 남편을 곁에 두려 했던 미친 후아나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미 죽어버린 이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한 얼굴. 나는 어떤 말로도 그녀의 표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호사가들의 입에 쉽게 오르내릴 인물이 아니었다.
미술관은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우리가 그 그림 아래 서 있는 동안에도 많은 이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을 겪으면 저런 표정이 될 수 있나, 누군가를 저렇게 사랑해본 적이 있나, 라는 생각에서부터 그 그림을 그린 화가 또한 그런 슬픔을 겪은 이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이틀 후면 200일이 되는 그날이 떠올랐다. 망가진 삶. 우리에게 큰 상처가 남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후아나에게는 충분히 애도할 시간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시신을 부르고스에서 그라나다까지 운구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40년 동안 성안에 유폐된 채 남편을 그리워했다. 그날 그곳에서 고야를 비롯한 문제작들을 많이 보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미친 후아나’였다.
이곳에서 세월호 특별법 합의에 대해 들었다. 이상호 감독의 영화 <다이빙벨>에 관한 소식도 들었다. 빨리 세월호를 잊자는 정부에게서 얼마나 진실된 진상규명이 이루어질지 믿을 수 없다. 이렇게 쉽게 잊힐 일이 아니다. 잊히지 않는다. 틈만 나면 세월호를 떠올린다. 충분히 애도해야 한다.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든 그것이 혹시 누군가에게는 ‘미친’ 것처럼 긴 시간이라 하더라도.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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