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현 논설위원
그날 퇴근길에 지나는 압구정동 풍경은 낯설었다. 가로수에 묶어 놓은 검은 펼침막들이 찬바람에 펄럭였다. 노란 은행잎들은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자선냄비 종소리가 바람 속에 흩어졌다. 비인간 취급에 제 몸을 살라 항의한 아파트 경비원도 일터로 가려면 늘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그의 장례를 앞두고 걸린 만장 같은 펼침막들과 화려한 백화점 앞뜰의 자선냄비는 서로를 밀쳐내며 비현실적인 풍경을 빚어냈다.
<한겨레> 누리집에 실린 포토 인터랙티브 ‘서울 그때 거기’(▷ 인터랙티브 기사 바로가기)를 보면, 1980년대 초 압구정동은 아파트만 덩그러니 들어선 허허벌판이었다. 오랫동안 배밭을 가꿔온 농촌 마을의 흔적이 흑백사진 속에 남아 있었다. 실로 상전벽해다. 83년 2200달러였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0년 만에 2만5920달러로 치솟은 고도성장은 당시와 현재가 교차하는 풍경 사진 속에 비현실적으로 압축돼 있다.
하지만 놀랍도록 변하지 않은 것도 많다. “하루 24시간의 고된 근무… 보수는 생활급에도 훨씬 못 미치고… 인간적인 대접도 받지 못하고… 언제 해고당할지 몰라 전전긍긍….” 아파트 경비원의 현실을 다룬 82년 <경향신문> 기사는 마치 오늘 써서 32년 전으로 송고한 듯하다. 버려진 라면이나 배춧잎을 주워다 곰팡이 가득한 지하방에서 끓여 먹는 칠십 노인도 저 흑백사진 속이 아니라 2014년 서울에 살고 있다.(인권위 ‘최저생계비 이하 비수급 빈곤층 실태조사’) 105만명으로 추산되는 비수급 빈곤층의 삶은 “70~80년대에나 있었던 절대빈곤”(문진영 서강대 교수)이다. 최저기준 이하의 삶이 아직도 이렇게 넘쳐나다니, 성장의 과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90년대 들어 집적된 풍요가 폭발적으로 향유되는 공간적 상징이 압구정동이었다.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공장”(유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을 향한 젊은이들의 마음엔 멸시와 동경이 뒤섞여 있었다. 그때만 해도 계층상승의 사다리는 튼튼해 보였고, 넘치는 풍요는 압구정동·강남·서울의 울타리 너머로 퍼져나가리란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95년부터 세계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불평등이 심화”(정태인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준비위원)했고, 비수급 빈곤층의 78.8%는 자녀를 학원에도 보내지 못한다. 최저임금도 못 받는 노동자는 2001년 59만명에서 227만명으로 늘었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이제 많은 이들에게 저 울타리 너머로 들어가는 방법은 늙은 경비노동자가 되는 길뿐인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 영혼이란 게 있다면, 배밭 일구던 순수한 청년에서 돈을 움켜쥔 교활한 중년으로 타락한 게 틀림없다. 아이들 밥 먹일 재원이 없다더니 ‘묻지마 예산’을 13조원이나 증액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고, 외국에선 부자들도 외치는 ‘부자 증세’가 금기어로 묶였다. 그 비정한 거리에서 경비원과 세 모녀와 독거노인과 쫓겨난 비정규직들이 자살하고, 미래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떨고 있다.
경제의 성과를 모든 국민의 인간적인 삶으로 승화시키는 게 국가의 의무라는 것을 옛 성인은 준엄한 비유로 설파했다. “개와 돼지가 사람이 먹을 양식을 먹어도 단속할 줄 모르며, 길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어도 창고를 열 줄 모르고, 사람들이 굶어 죽으면 ‘내 탓이 아니다. 흉년 탓이다’라고 하니, 이는 사람을 찔러 죽이고서 ‘내 탓이 아니다. 무기 탓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맹자> 양혜왕편) 국가의 부작위 살인을 추궁한 2300년 전 맹자의 혜안은 자선의 종소리만 울려 퍼지는 2014년 이 거리에서 또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인터랙티브] 서울 그때 거기, 30년 전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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