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소설가
‘통석의 염’이라는 이상한 말이 있었다. 1990년 우리나라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국 대통령을 환영하는 만찬장에서 일본 국왕이 쓴 말이다.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말이라 학자들은 그 말의 언어적 의미에 대해 골몰하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애석하고 안타깝다’는 뜻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 뜻대로라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한 일이 애석하고 안타깝다는 것인데, 그러나 정말 애석하고도 안타깝게도 그때 일본 국왕이 사용한 ‘통석’의 뜻은 그 너머에 있다. 한국 대통령이 자기 나라를 방문하고 이제 일본도 관계개선을 위하여 사과의 말을 담아야 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 너무도 비통하고 답답하다는 뜻이다. 그는 자기 나라 국민에 대해서도 외국에 대해서도 절대 사과의 말 같은 것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절대적 위치에 있는 이른바 이름도 거룩한 그들의 ‘천황’이기 때문이다.
집안 어른 중에 1950년대에 군대에서 사단장의 운전병을 한 사람이 있다. 이 어른은 자기가 운전하여 태우고 다닌 사단장을 ‘각하’라고 불렀다. 그 말을 들은 게 1970년대의 일이라 매우 낯설게 들려 일부러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경칭’이란 풀이가 나와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못 부를 말도 아니다. 장관 각하, 도지사 각하, 사령관 각하. 일반적으로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그러던 말이 1961년 군사정변 이후 오직 한 사람의 정치적 권력적 지존에게만 쓰는 말로 바뀌었다. 그 말이 너무도 권위적으로 쓰여 20년 전 문민정부 시절 대통령부터 쓰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민주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거의 사라진 말이 되었다.
그 말이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집권여당 지도부의 오찬 자리에서 여당 원내대표가 이렇게 불러주어 감사하다는 극존경의 인사말 속에 세 번이나 ‘대통령 각하’를 언급하며 되살아났다. 국민보다 자기의 정치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에 대한 아부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떤 회동에서도 참석자 모두 그 말을 다시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생겼다. 대통령이 원해서 부른 말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말로써 정치적 지존의 위치로 ‘받들어 모셔지는’ 사람은 앞의 일본 왕의 예에서 보듯 존재의 위치상 사과의 말을 입에 올리기 어렵게 된다. 사과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뺀 주어 없는 사과를 하거나 남 탓의 사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멀리 가지 않고 세월호와 최근 십상시 난장의 일만 돌아보아도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땅콩 회항’으로 국제적 웃음거리가 된 대한항공의 사과문 역시 그렇다. 부사장 자신이 아니라 회사 홍보실 차원에서 썼을 것이다. 쓰면서 그들도 그렇게 쓰면 더 웃음거리가 되고 국민적 저항에 부딪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고객이나 국민보다 당장 자기의 밥줄을 쥐고 있는 오너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술집에서 싸움질하다가 맞고 들어왔다고 조직폭력배를 앞세우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진두지휘한 어느 재벌 총수의 사적 보복행위가 물의를 빚었을 때도 회사 차원에서 뿌려진 사과문에는 그것을 세상에 둘도 없는 ‘아버지의 애틋한 부정’으로 변명했다. 세상이 어지럽고 먹고살기 어렵다 보니 우리의 아름답고 멀쩡한 말들이 생으로 고생한다.
다시 ‘통석의 염’을 빌려와 그때나 지금이나 애석하고도 안타깝게 우리는 여전히 안으로도 밖으로도 제대로 사과다운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사는 장기판의 졸 같은 국민인 것이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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