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김기원 선생을 보내며 그를 다시 읽다 / 이경

등록 2014-12-16 18:41

이경 논설위원
이경 논설위원
김기원 선생은 뭐라고 얘기할까? 청와대 비선 국정개입 의혹 사건과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을 보며 김 선생의 분석과 해법이 궁금해진다. 그가 있다면 늘 그랬듯이 자신이 벼린 남다른 지혜를 아낌없이 나눠줬을 텐데 이제 더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니 벌써 그가 그립다. 진보 경제학계의 큰 별인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시리고 먹먹하다. 스승이자 멘토인 그의 글들을 이참에 다시 읽어본다.

“재벌개혁이란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재벌 죽이기’나 ‘재벌 혼내주기’가 아니라 ‘재벌 거듭나기’다. 재벌 총수의 부패와 무능을 바로잡아 재벌기업을 선진적 대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것이다. 선진적 대기업이란 경영의 투명성·책임성·전문성을 갖춘 대기업이다. 이는 경영을 불투명하게 해 회사 재산을 개인 재산처럼 멋대로 빼돌리고, 총수는 부패하고 무능해도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고, 단지 총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영 능력을 검증받지도 않고 최고경영자 지위를 물려받는 재벌체제를 탈피한 기업이다.” 치열한 이론 연구에다 다리품을 보태 내린 그의 결론을 대하면 재벌개혁 목표가 무엇인지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그는 용어 사용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진보/보수와 개혁/수구를 제대로 가려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지 않으면 누가 우리 편이고 다른 편인지 헷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봤다. “근대사회는 시장과 국가를 두 축으로 한다. 여기서 진보파는 시장보다 국가를 더 선호하며 보수파는 그 반대다. 진보파가 ‘큰 국가론’, 보수파가 ‘작은 국가론’에 가까운 셈이다. 하지만 진보파와 보수파의 구별은 시장과 국가의 크기(양)뿐만 아니라, 국가가 노동과 자본의 이익 중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느냐와도 관련된다. 박정희 정권처럼 큰 국가라도 사회복지보다 자본축적을 더 중시하면 보수파다. … 한편 한국의 정치세력이나 이념을 평가할 땐 ‘진보와 보수’라는 기준과 별개로 ‘개혁과 수구’라는 구분도 필요하다. … 개혁파는 시장과 국가의 질, 즉 성숙도를 높이려는 세력이고 수구파는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다. 시장의 질 제고란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경쟁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국가의 질 제고란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는 또 진보세력이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일반 대중들이 잘 모르며 “기껏해야 뭔가 나쁜 거라고 어렴풋이 느낄 뿐”이라는 게 그 이유다. 대신 ‘시장만능주의’로 바꾸자고 했는데, 그의 권고를 따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몇 년 전부터 북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그는, 남북관계를 기술하는 표현도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바 있다. 상대를 배려해 “남한은 ‘북남관계’나 ‘북남정상회담’이라고 쓰고, 북한은 ‘남북관계’나 ‘남북정상회담’이라고” 쓰자는 것이다.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 이는 그가 이 시대 한국인들의 팍팍한 삶을 요약한 세 개의 키워드다. “‘고단함’은 생산과정의 문제다. 노동력과 재화·서비스 생산과정에서 한국인의 삶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고단하다. … ‘억울함’은 1차 분배과정의 문제로서, 시장의 불공평한 분배에 대한 억울함이 사람들을 열받게 만드는 것이다. … ‘불안함’이란 2차 분배과정 곧 재분배(복지)의 문제다.” 그는 진보·개혁 세력이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가 자주 했던 “(특히) 시장과 투쟁할 땐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유연성이 필요하다” “진리는 서커스 외줄타기다”라는 말이 귓전을 맴돈다.

이경 논설위원 jaewo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