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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세현 칼럼] ‘전략적 인내’의 민낯이 드러났다

등록 2014-12-28 18:51

정세현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전 통일부 장관
‘전략적 인내’. 2009년 말 이래 오바마 정부가 견지해온 북핵정책이다. ‘북한의 선행동’, ‘중국의 역할’은 그 실천강령이다.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고, 중국이 ‘북한의 선행동’을 끌어내라는 것이다. 미국은 감나무 밑에 누워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것이고, 중국이 감나무를 흔들라는 것이다.

한국은 한시바삐 6자회담을 재개해서 북핵능력 강화를 막아야만 하는데 미국은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대붕(大鵬)의 뜻을 모르는 연작(燕雀)’으로 치부될까 봐 전문가들도 감히 문제제기를 안 하는 것 같다. 아니 못 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하늘 같은 동맹국의 대북정책에 시비를 걸면 반미로 찍히고 그러면 곧바로 종북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요즘 국내 정치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은 전략 수립을 위해 시뮬레이션을 많이 한다.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전략적 인내’가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허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최근 하버드대 조지프 나이 교수의 인터뷰에서 ‘전략적 인내’의 민낯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실은 고도의 무기시장 관리 전략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나이 교수는 카터 정부 국무부 부차관보, 클린턴 정부 국방부 차관보를 역임했다. 77살인데도 아직 케네디 스쿨에서 강의하면서 오바마 정부 외교정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9월 한 여론조사에서 미 외교 분야 학자들과 관료들은 그를 최고 정책 브레인으로 꼽았다. 나이 교수가 곧 미 정부는 아니지만 정부와 입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최근 서울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석했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가 지난 15일치 신문에 실렸다.

북핵문제 해결책이 없느냐는 질문에 “좋은 방안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은 그동안 기다려왔지만 향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 다만 준비는 돼 있어야 한다. 미국과 한국의 긴밀한 관계가 어떤 때보다 중요하다. … 중국이 북한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 그런데 중국도 김정은 독재가 끝나야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은 아마도 북한 붕괴를 염두에 둔 표현 같다. 아무튼 나이는 중국의 역할만 강조했다. ‘전략적 인내’는 북한이 자진해서 핵을 버릴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냐는 질문에 나이 교수는 “기다리지 않는다면 무슨 대안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나쁜 딱지는 다 붙여 놓고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기를 기다린다? 북핵은 중국이 포기시켜야 한다? 이렇게 전후모순이 심하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핵비확산 책임국을 자임해온 미국의 북핵정책이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이건 고도로 계산된 성동격서 전략일 수 있다. 나는 나이 교수가 이번 인터뷰에서 부지불식간에 미국 북핵정책의 본심을 자백해버렸다고 본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듯이. 그래서 이런 추측을 해본다.

미국이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시간을 끌면, 그 ‘틈새시간’에 북한은 결국 핵보유국이 된다. 북한이 핵탄두 몇 개 가져봤자 미국에는 별 위협이 안 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는 절대 위협이 된다. 특히 북한에 핵멱살 잡히면, 한국은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에 전전긍긍하면서 대미 안보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 미국 무기시장은 확장되고 북한을 빙자한 중국 견제도 강화할 수 있다. 따라서 쓰고 난 핵연료 재처리(파이로프로세싱)를 허용해달라는 한국의 요구는 절대 들어주면 안 된다. 한국이 핵무기 제조 능력을 가지면 무기시장이 좁아지니까.

나는 이런 추측이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그러나 ‘전략적 인내’의 민낯이 이렇다면 우리 정부는 고민해봐야 한다. 미사여구 뒤에서 자국 국익만 챙기는 동맹국과 관성적으로 공조하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인가? 선택적 공조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건가? 우리가 중국과 손잡고 북핵 6자회담 재개를 선도하면 미국에 대한 도전이 되는 건가?

정세현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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