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여성 화가 마리 로랑생의 시는 번역 과정에서 너무 심하게 의역이 된 경우다. 흔히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라고들 말하지만 실제 이 시의 원문에는 ‘여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그래서 “죽음보다 더 불쌍한 것은 잊혀짐”이다. 세상의 모든 잊혀진 것은 슬프다.
요즘 야당을 볼 때마다 이 시가 자주 떠오르는 것은 ‘잊혀짐’만큼 지금의 야당 처지를 적절히 묘사하는 단어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새로운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 주자들끼리의 싸움이 가열되고 있지만 대다수 유권자한테는 관심 영역 밖의 일이다. 이 시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야당은 권태로운 야당, 슬픔에 젖은 야당, 병을 앓는 야당, 버림받은 야당, 쫓겨난 야당, 죽은 야당의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국민의 뇌리에서 아스라이 잊혀져 가는 야당이 되고 말았다. 당명 개정을 둘러싼 논란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이 그나마 야당을 망각의 늪에서 끌어낸 성과라고나 할까.
존재감 없는 야당, 저항은 하지만 결코 위협이 되지는 못하는 야당은 권력의 최대 응원자다. 세월호 참사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이렇게 큰소리를 탕탕 치는 것도, 헌법재판소가 8 대 1이라는 비상식적 표차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것도, 검찰이 비선 세력 국정개입 의혹 사건에 대해 아무도 믿지 않는 수사 결과를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존재가 미미한 야당이 있기에 가능하다.
대의민주주의 체제는 좋든 싫든 선거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아무리 시민사회가 분노하고 들끓어도 야당이 선거에서 정권의 실정을 정당화해주는 ‘추인 기구’ 노릇만 하는 현실 앞에서는 모든 게 허망해진다. 그것은 단지 야당의 패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치적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를 부추기며 진보개혁세력 전체의 사기 저하와 침체라는 악순환을 동반한다. 4월에 있을 재보궐선거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헌재의 민주주의 압살에 대한 정치적 추인의 대못 박기로 끝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존재감 없는 야당의 위상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신당과 지지율에서 별 차이가 없는 데서도 확인된다. 신당 태동 움직임은 그 자체가 수명을 다한 야당의 참담한 현주소다.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이 전당대회를 치르고 나면 지도력을 회복하고 지지율이 되살아나 수권정당으로 환생할 것으로 믿을 사람은 없다. 오히려 전당대회 뒤가 더 걱정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당이 야권의 희망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역량부터가 의심스럽다. 기존 야당에 대한 환멸감에 의존하는 신당은 출발부터 한계를 지닌다. 신당 출범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야권 분열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기존의 야당은 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새로운 야당은 분열의 씨앗이 되는 상황, 여기에 지금의 야권,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가 당면한 딜레마가 있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야권에 대해서는 사실 더 해줄 말도 마땅히 없다. 다만 야당은 우선 자신들의 ‘보잘것없음’, 너나 할 것 없이 잊혀진 존재라는 서글픈 현실부터 직시했으면 한다. 야당 안에서 이름깨나 있는 정치인들도 자신들이 걸출한 준마가 아니라 조랑말에 불과함을 인정했으면 한다. 자신의 욕망 안에서 민심을 읽는 한 패배는 계속된다. ‘야당의 주류화’란 원대한 목표를 접고 고작 ‘야당 내 주류화’나 좇는 한심한 자세로는 영원히 그 모양 그 꼴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서로를 보듬고, 현재의 정당 틀을 넘어서는 대담한 활로를 모색하는 역전의 발상도 이런 처연한 인식에서부터 비로소 가능해진다.
마리 로랑생의 시의 원제는 ‘진정제’(Le Calmant)다. 온갖 불행을 겪은 이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고통을 가라앉히는 진정제라는 의미일까. 야당의 경우도 잊혀진 존재로, 그저 부스러기 권력에 안주하며 살아가면 그럭저럭 행복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야당에 대한 진정제는 될지언정 고통받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진정제가 될 수는 없다. 을미년 새해, 문제는 여당이 아니라 야당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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