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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한끼의 쾌락, 한끼의 사치 / 권보드래

등록 2015-01-23 18:47수정 2015-01-23 18:47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면 흉내 내 봐야 직성이 풀린다. 해물누룽지탕도 끓여보고 도미탕수도 만들어 보고 각종 초밥에 롤도 말아본다. 맛은 대체로 7·80점 수준이라 전문적인 손길과는 거리가 멀다. 외려 주변을 곤혹스럽게 하기 일쑤다. 미지근한 해물누룽지탕이라든지 간 안 맞는 블루베리떡을 대접받았다고 생각해 보시라. 언젠가 후배 생일을 빙자해 방울토마토를 잔뜩 올린 대형 생크림 케이크를 선사한 적도 있는데, 음, 처리하느라 고생했겠다.

먹는 일도 즐겁지만 먹이는 일도 즐겁다. 삼시세끼가 고단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워킹맘이라 세끼 다 차리는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그래도 밥상 차리는 일은 고되다. 퇴근하자마자 부엌으로 돌진해야 할 때는 더 쉽게 신경질적이 돼버린다. 참으려 하는데도 “내가 파출부야?”라거나 “엄마가 너희들 하녀냐?”라는 문장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2·3년 전부턴 아침 주식을 빵으로 바꾸었다. 머리카락에 배어 있을 부엌 냄새가 오전 수업 때마다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빵이나 베이컨 굽는 냄새는 괜찮은데 김치 냄새는 면구스럽다. 생활의 바닥을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계층화되지 않은 냄새이기 때문일까. 일반적으로 음식은 경제·사회적 계층을 신체 깊숙이 새겨 넣는 감각적 자료다. 와인은 어떤 걸 좋아하세요? 바질 페스토 좀 주시겠어요? 이거 알덴테로 잘 삶았네요. 디저트는 여기 레몬 머랭이 유명하던데. 유럽풍이 물씬한 음식점에서 능숙하게 주문하고 품평할 수 있는 능력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요즘 같아선 이 능력까지 서바이벌 키트에 포함시켜야 할 형편이다.

직장 얘기는 지루하고 정치 얘기는 부담스럽고 연예계 화제만으론 허전하다 싶을 때, 음식과 맛집은 딱 적절한 이야깃거리다. 누구든 탐내 볼 만한 한끼의 쾌락, 한끼의 사치. 매일매일의 김치 냄새를 지울 수 있는 온갖 이국적인 풍미와 향취.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쾌락이 조금쯤 분배되는 것 같다. 20여년 전인가 싸구려 페이퍼백을 읽다가 ‘우리에게 남은 혁명의 영역이란 음식과 섹스뿐’이란 구절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어느새 그런 시기가 도래한 건지.

2014년은 대한민국이 사소한 쾌락에 탐닉하기 시작한 해로도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허니버터칩 소동이 있었는가 하면 슈퍼마리오 대란도 있었고 크리스마스 무렵엔 파워레인저 다이노포스 때문에도 법석이었다. 신제품 출시 때면 텐트 치고 밤새 기다리는 미국식 풍경도 머잖아 볼 수 있지 싶다. 먹방과 맛집, 그리고 각종 피규어며 게임에 프라모델. 명품 백보다 훨씬 싸고 개성적인 쾌락. 번번이 7·80점인 요리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니 아직은 그걸로 괜찮으려나?

초기 부족사회에서는 족장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더라만. 음식 문화만큼 정교하게 계층화되는 문화도 드물지만, 한편 맛있는 음식은 거의 보편타당한 진리다. 소박한 식탁의 미덕을 애써 떠올려도 갑남을녀로선 유혹에 저항하기 어렵다. 가질 수 없는 집과 살 수 없는 온갖 사치재에 비하면 맛집은 훨씬 현실적인 선택지다. 더구나 누구나 하루 세끼를 먹지 않는가.

함께 밥을 먹는 습관은 사람이 사람 된 소이다. 사람 이외의 짐승은 성행위를 공개리에 하는 대신 먹이는 제각각 먹는단다. 반면 사람은 함께 먹고 먹인다. 공동성의 핵심엔 늘 공동의 밥이 있다. 먹방과 맛집 열풍, 누구 말마따나 구강기적 퇴행이라 진단해야 할 현상에서도 모종의 갈망을 읽어내고픈 이유다. 김치 냄새 풍기는 자아와 불화할지언정, 부조리하나마 그것이 지금 지닌 거의 전부라면.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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