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임덕’(lame duck, 절름발이 오리)은 임기 만료를 앞둔 공직자, 특히 대통령의 권력 누수를 빗댄 말이다. 18세기 런던 주식시장에서 파산한 주식중개인을 가리키는 은어였는데,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쓰면서 정치용어로 굳어졌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후임자가 정해진 뒤 남은 임기를 보내는 현직 대통령이나, 2기째의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대통령이 의회에서 정책을 제대로 관철하지 못하는 경우를 주로 가리킨다. 그 기간도 그리 길지 않다. ‘11월의 첫 월요일 다음의 화요일’인 대통령선거일부터 다음해 1월20일 새 대통령 취임일까지라면 두 달 남짓이다. 3월4일이 취임일이던 1933년 이전엔 넉 달이다. 그사이에도 많은 일이 벌어진다. 1860년 넉 달 동안엔 남부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남북전쟁이 촉발됐고, 1932년 대공황 때는 현직과 당선자의 불화가 떠들썩했다.
‘대통령의 영(令)이 서지 않는’ 한국의 레임덕도 임기 말 현상이다. 전두환 시대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측근·친인척 비리로 소란한 나날을 보내고 여당에서 탈당을 강요당하는 따위 수모를 겪은 것은 대개 임기 5년차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년차인 2011년이 조기 레임덕이라지만, 그때는 유력 대선주자였던 박근혜 의원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그런 강력한 경쟁자도 없는데 벌써 레임덕을 겪고 있다. 임기가 3년 넘게 남았는데도 집권당 지도부는 “대통령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이들로 채워졌다. 2011년 ‘친이’(친이명박) 인사들이 원내대표와 당대표 경선에서 줄줄이 패했을 때, ‘친박’(친박근혜)의 핵심 인사는 “청와대가 당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당 대표와 원내대표 경선에서 ‘친박’이 모두 패배한 지금이 딱 그대로다. 아니나다를까, 여당의 새 지도부는 원내대표 경선 직후부터 주요 정책의 수정, 전면적 인사 쇄신과 국정운영의 변화를 대통령에게 요구하고 나섰다. 앞으로 어떤 놀랄 일이 더 벌어질지도 알 수 없다.
대통령을 레임덕에 빠뜨린 것은 최근 한두 달 사이 급격한 지지율 하락이다. 1년 전에 견줘 20%포인트 넘게 떨어졌으니, 얼추 400만명 가까운 기존 지지층이 이탈한 셈이다. 지지율 하락을 돌이키기 어렵자 내년 총선을 앞두고 다급해진 새누리당 의원들이 잽싸게 몸을 돌려 만든 것이 지금의 여당 지도부다. ‘선거의 여왕’이 선거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외면당한 것이다. 이대로 가면 ‘친박’도 예전의 여느 계파들처럼 가뭇없이 분해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지지율을 되살리려면 대통령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누구보다 독특하게 살아온 박 대통령은 더할 것이다. 수십년 한 몸처럼 지내온 ‘비서 3인방’을 내치기도, 소수를 통해서만 외부와 소통하는 폐쇄적·배타적 리더십을 바꾸기도 쉽지 않다. 그걸 못하는 터에선 어색하게 차 한잔을 더 마시거나 떠들썩하게 재래시장을 찾는들 ‘대통령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는다. 국정운영의 동력이 꺾였으니 작은 개혁도 쉽지 않고, 핑계 삼아 내걸어온 경제 회복과 민생도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래저래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고집불통 대통령’에서 벗어나기는 지난하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종북몰이를 앞세웠던 그동안의 ‘뺄셈 정치’로는 핵심 지지층을 묶어두기도 힘겨운 것으로 이미 드러났다. 지금이라도 포용과 통합의 대변신을 시도하지 않고 ‘하던 대로’만 고집하면 남은 3년은 더 험하고 거칠 것이다. 그런 뻔한 길을 가기엔 3년이 너무 길지 않은가.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여현호 논설위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