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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검사님의 캐릭터 / 여현호

등록 2015-02-24 18:43

전직 고위 검사들이 기함을 했다기에 <에스비에스> 드라마 ‘펀치’를 뒤늦게 챙겨 보았다. 어색한 점이 많다. 피해자가 바로 그 사건의 공판 검사로 나선 대목도 그렇거니와, 결심 공판에서 느닷없이 추가 증거를 내놓는다든지 피고인을 피의자라고 부르는 모습 따위가 턱턱 걸려 몰입을 막는다. 무엇보다 검사들이 조폭처럼 검찰총장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장면에선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 사람들이 검찰을 이렇게 보고 있구나. 드라마에서 검사는 누구를 수사하고 풀어줄지, 무슨 죄목으로 기소할지 마음대로 정하고 조작까지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다.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은 부정과 부패의 상징이고, 음모와 배신으로 얼룩진 권력다툼을 벌이면서 더 큰 권력에는 또 꼼짝없이 복속한다. 검사는 영달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저지르는 파렴치한 범죄자다.

꼭 20년 전인 1995년 2월 평균시청률 50.8%의 경이로운 기록으로 종영한 <에스비에스> 드라마 ‘모래시계’의 강우석 검사는 전혀 달랐다. 온갖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겠다며 정치권과 암흑가의 유착을 파헤친 정의로운 검사였다. 도덕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인물로 그려졌다.

‘모래시계’는 ‘모래시계 검사’에서 비롯돼 ‘국민검사’를 낳았다. 1993년 슬롯머신 사건으로 정계와 검찰 실력자들을 구속했던 홍준표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는 드라마의 소재가 되면서 한동안 모래시계 검사로 불렸다. 드라마 속 검사는 현실에서도 찾아졌다. 1997년 한보 사건으로 현직 대통령의 아들을 구속했던 심재륜 당시 대검 중수부장,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와 한나라당 대선자금 수사의 안대희 전 대검 중수부장은 살아있는 권력과 맞부딪치면서 ‘국민검사’로 불렸다. 검사 팬클럽도 만들어졌다. 지금은 그런 일이 정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득하기만 하다.

‘펀치’ 역시 이 시대의 검찰상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홍준표 경남지사의 말대로 “벤츠 여검사에 그랜저 부장검사, 피의자 부인을 검찰청사 내에서 간음한 검사까지 있는” 최근 검찰의 부끄러운 모습엔 검찰로서도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하다. ‘도덕성을 상실한 무소불위의 권력’, ‘권력다툼을 위해, 권력의 뜻에 맞춰 사건을 주무르는’ 모습도 지난 몇년간 자주 봐온 일들이기에 거부감 없이 생생하게 실감났을 것이다. 드라마의 그런 검찰상은 이번엔 무엇을 낳을 것인가.

심리학에선 타인의 긍정적인 기대에 부응하는 쪽으로 노력해 좋은 결과를 낸다는 ‘피그말리온 효과’와, 부정적으로 평가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방향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낙인효과’가 있다. 공공조직에서도 조직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에 구성원들은 낙인효과를 겪는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정부 초기 회자했던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존재’란 말은 무사안일·복지부동·철밥통 등 다른 어떤 부정적 표현보다 공무원들에게 낙인효과가 컸다는 분석이 있다. 이는 통치권력 앞에서 행정이 전혀 재량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 파행이 그런 경우다.

여현호 논설위원
여현호 논설위원
검찰도 낙인효과에 빠진 듯하다. 정치검찰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이젠 검사들도 권력의 뜻에 따르는 것을 별스럽지 않게 여기게 된 것은 아닐까. 정윤회 사건에서 비선 권력의 행사 의혹이 확연한데도 정씨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자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는 게 그런 마비증상의 하나일 수 있다. 청와대의 특정인이 쥐락펴락하기 편하게 검찰 인사가 마구 헤집어지는데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검찰 독립이니 개혁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결과이겠다. 그러니 다음 모습은 뻔하다. 권력의 칼로서 지금보다 더 후안무치하게 설치는 정치검사들이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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