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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그 시절 원앙분식 / 권보드래

등록 2015-02-27 18:37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20대 한때 낮술을 열심히 마셔댄 적이 있다. 술은 마셔야 하겠는데 알코올분해효소가 희박한 신체고, 게다가 귀가시간 통제도 무시 못한다는 소심한 이유에서였다. 요컨대 벌건 얼굴로 부모의 꾸지람 속에 귀가하기가 싫었던 거다. 낮술엔 벗이 있기 어려워 주로 혼자 마셨다. 오후 두어시쯤 시작해 네댓시에 끝내는 혼자만의 술자리였다.

술집이 문 열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마침 밥도 팔고 술도 파는 분식점이 있어 하루건너 그곳에 갔다. 주문했던 건 늘 똑같이 1000원짜리 어묵탕에 500원짜리 소주. 시간대가 시간대인지라 두어 시간 다 가도록 혼자일 때가 많았다. 30대쯤으로 보이는 어여쁜 주인아주머니는 저쪽 계산대 앞 테이블에 앉아 계시곤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돌이켜보면 정말 고맙다. 제대로 매상 올리는 것도 아니고, 벌건 얼굴로 대낮에 술 퍼마시는 여학생이 고왔을 리 없는데 아주머니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요란하게 반기는 법도 없었고 괜스레 말 거는 일도 없었다. 텔레비전은 없었고 가끔 라디오를 틀었다. 그러고 보니 변진섭의 ‘희망사항’을 거기서 처음 들었나 싶다.

1, 2년쯤 그러다 말았는데, 몇해 뒤 분식점 주인이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에야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감사했다고 인사를 해야 했는데. 들러서 다시 어묵탕에 소주라도 주문해야 했는데. 20년이 훨씬 넘게 지났지만 가끔 그 집 이름이 떠오르면 마음이 잠깐 멈추곤 한다.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가게는 그냥 가게만이 아니다. 돈 내고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한다는 행위는 거래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다. 주머니 가볍고 머리는 무거웠던 시절, 아, 그 술집이며 서점들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어지간히 개차반이었던 술자리에, 서점에서 책 빌려 복사한 후 돌려주는 그런 문화가 용인되는 시절이었다. 술값 안 갚는 학생들 때문에 실제로 파산해버린 술집도 있었는데, 그 주인댁 늦게나마 복 받으셨기를.

이제는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직장과 집을 오가는 안전한 생활을 중심으로 산다. 밖에서 노니는 시간이 줄어 그런지 단골집도 없어졌다. 학생들과 함께 가는 학교 앞 꼴뚜기집, 가족과 함께 들르는 칼국수집과 파스타집 정도가 그나마 내 얼굴을 기억해줄 집일까. 프랜차이즈가 잠식해버린 규모가 하도 커서 그런지, 매일이다시피 커피를 마시지만 단골 커피집은 많지 않다.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상호에, 자주 바뀌는 아르바이트생을 만나고 마는 게 대부분이니 말이다.

단골이란 불편한 관계이기도 하다. 일단 친교나 충성을 인정하고 나면 다른 집 가기가 면구스러워진다. 불만이 생겨도 토로하기 난감해진다. 단골집이 내부 수리라도 할라치면 살짝 해방감을 느끼는 건 그 때문일 게다. 10년 넘게 단골 삼은 정육점이 있는데, 저쪽에 또 괜찮은 가게가 생겨 그쪽으로 갈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얼마나 갈등을 느끼는지. 돈 주고 물건 사는 관계라고 하면 그뿐이지만 세상사 그리 간단치 않다.

어머니는 외상 달고 물건 사던 시절을 종종 떠올리신다. 월급 받으면 제일 먼저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외상값을 갚곤 했단다. 그 당시 신용이란 그렇듯 얼굴 자주 보는 사이에서 구축되는 관계였다. 요즘의 신용이란 기업이 보증하고 정부가 책임지노라는 체계다. 모범적 소비자로 있을 땐 고분고분하지만 며칠 연체라도 할라치면 표변하는 체계이기도 하다.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 정답기도 불편하기도 한 사이로 만나는 게 아니라 교환관계 속 추상명사로 만나다 보니 당연한 일이랄까. 이런, 오늘은 원앙분식이 그립다.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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