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우발적인 사고들을 접할 때마다 30년 전 국어 시간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왜 책을 읽지 않느냐고 우리들을 꾸짖은 뒤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이야기를 꺼냈다.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살해하기까지 작가는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의 내면 묘사에 긴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어릴 적 읽었던 그 부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한참 뒤 <죄와 벌>을 읽게 되었을 때 선생님의 말처럼 그 부분의 분량이 길지 않아서 의아했지만 그 시대의 지식인인 한 청년의 고뇌, 거듭되는 확신과 회의,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그 과정은 감동적이었다. 한 인물이 어떤 결단을 내리기까지의 시간이라면 적어도 그 정도의 시간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선생님이 얘기한 긴 분량이라는 말이, 단지 원고 매수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난 명절 친정에 들렀다가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설거지를 하고 남은 음식들을 정리하면서 띄엄띄엄 보아서인지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그 프로의 애시청자인 동생은 이미 본 방송을 다시 보는 듯 뒷이야기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한가한 어촌 마을로 가끔 그 집에 들르는 아이들이 있고 개, 고양이도 한 마리씩 있다. 어촌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만 남자 출연자들이 한 끼 밥상을 차리는데 밥을 먹고 난 뒤의 다음 미션이란 또 다른 한 끼를 준비하는 일이다. 음식을 구하고 만드는 과정 중에 시행착오가 생기는데 그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그래도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고 있으면 걱정거리가 없어져.” 동생이 화면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 그 시간에도 종종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때마다 뛰어도 너무 뛴다고 어머니가 위층에 손가락질을 해댔는데 층간 소음으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고들이 떠올라 그냥 참으라고, 참는 게 능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그예 일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다못한 어머니가 윗집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는데 술 취한 사람이 나와 대체 뛰긴 누가 뛰었냐면서 주먹을 불끈 쥐더라는 것이다. 그걸 보고 돌아설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으래? 치려고? 치려고?” 안 보고도 그림이 그려졌다. 같이 간 경비원 아저씨가 말리는 바람에 그 정도에서 무마된 모양인데 불안감이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총기 사고는 물론이고 억울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일도 일어났다. 애인의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해 상대를 해치기도 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일들이 벌어진다.
이쯤 되면 이 분노를 개인 혼자만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말 일이 아닌 듯하다. 분노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 중 20대 남성이 가장 많다는 보고도 있었다. 입시와 취업으로 인한 긴장과 실패는 물론 경제적인 불황 속에서 자포자기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자칫 사회적인 증오로 이어질까 봐 두렵다. 단지 주목을 받고 싶다는 이유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모욕한 젊은이들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이건 모두 사회적인 인습과 그에 따르는 관습 때문입니다”라는 라스콜니코프의 말에 소냐는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렇잖아도 괴로운 일이 많으니까요”라고 대답한다. 너무 고단한 하루하루다. 그렇다고 화가 날 때면 15초 동안 큰 숨을 내쉬세요, 라거나 <삼시세끼>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힐링하세요, 라고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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