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논설위원
유럽중앙은행(ECB)이 디플레이션을 막고 경기를 띄우기 위해 9일 양적완화에 나섰다. 내년 9월까지 한달에 600억유로(71조원)씩 대략 1조1000억유로의 돈이 시장에 풀리게 된다. 하지만 디플레이션 우려 등이 말끔히 해소될지는 알 수 없다. 유럽중앙은행이 ‘헬리콥터에서 돈 뿌리기’를 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가계에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다. ‘헬리콥터에서 돈 뿌리기’는 통화주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이 제시하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가 대중화한 아이디어다. 디플레이션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일러준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며칠 전 “저물가 상황이 이어져 디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큰 걱정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우리 경제의 디플레이션 논란을 더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최 부총리는 이런 디플레이션 우려를 덜고 내수를 부양하기 위해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특히 “최저임금을 빠른 속도로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최 부총리의 이런 진단과 처방에 상당부분 공감한다. 먼저, 물가 동향을 보자.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한해 전에 견줘 0.5% 올라, 물가수준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은 분명 아니다. 농산물과 석유류를 뺀 근원물가 상승률(2.3%)과 기대 인플레이션율(2.6%)을 봐도 그렇다. 두 수치는 물가 변동에 담긴 의미를 짚어볼 때 많이 쓰는 지표다. 문제는 담뱃값 인상이 없었다면 물가상승률이 -0.1%로 뚝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상승률이 둔화하는 추세여서 디플레에 대한 걱정을 지우기 어렵게 돼 있다.
다음은 임금 인상 처방이다. 왜 이런 방안이 필요한지는 일본을 지켜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일본에서는 디플레 재발을 막는 동시에 경기 진작을 위해 아베 신조 총리가 나서서 기업들에 임금 인상을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임금이 오를 경우 소비가 늘어나 내수를 떠받치고, 이를 통해 상품 가격이 올라갈 가능성이 생겨서다.
우리나라로 돌아오면, 임금 가운데 최저임금은 폭이 문제지 인상 자체는 큰 쟁점이 안 될 것 같다. 최 부총리 발언이 나온 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은 별도 기구인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결정하는데 정부 방침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여기다 최저임금 인상에 소극적이던 새누리당이 최 부총리 발언에 공감을 나타내고, 새정치민주연합은 진작부터 대폭 인상을 요구해와 힘이 실릴 수 있다.
그런데 임금 일반으로 눈길을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업의 임금은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므로 최저임금처럼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다. 게다가 기업마다 형편이 달라 임금 인상 폭에서 큰 차이가 날 수 있다. 잘나가는 수출 대기업들은 이윤을 많이 내 현금성 자산을 많이 쌓아두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들도 있다. 임금 인상률에서 큰 차이가 나면 기업 간, 그중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 등은 더 벌어지기 마련이다. 임금 인상 방침이 애초 기대만큼 효과를 내지 못하고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에도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나는 경제민주화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재벌대기업들이 과실을 협력업체들과 적절히 나누도록 해서 협력업체들도 임금 인상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소득불평등을 해소할 길도 열린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때 “성장의 온기가 온 국민에게 골고루 퍼지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민주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금이야말로 사그라진 경제민주화 불씨를 되살려야 한다.
이경 논설위원 jae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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