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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절벽 끝에 살다 / 하성란

등록 2015-04-03 18:39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신어들을 훑어보는데 유난히 ‘절벽’이라는 낱말이 눈에 많이 띈다. 우리 사회를 일자리 절벽, 주거 절벽 등으로 설명한 책 <절벽사회> 때문이라는데 아쉽게도 아직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도 천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던 아찔하던 순간과 절벽 꼭대기를 올려다보면서 아득해지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얼마나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느냐에 따라서 사전 등재는 물론이고 표준어가 되기도 한다니, 이 ‘절벽’들이 일이년 뒤에도 여전히 활어로 남아 있을까 봐 걱정이다.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용어 중에 ‘88만원 세대’가 있다. 몇해 전 봄 가장 흥미로웠던 일 중 하나가 바로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이 이 책의 절판을 선언한 일이었다. 저자들의 바람과 달리 젊은이들은 자포자기했고 결국 이 책을 아예 움직이지 않은 이유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책이 출간되던 해에 중학교에 입학한 큰애가 어느덧 이십대에 진입했다. 상황은 더욱 나빠져서 ‘삼포’에 ‘오포’, 인간관계마저 포기하는 세대란 굴레가 덧씌워지게 되었다. 얼마 전 알바를 전전하던 한 젊은이가 홀로 쓸쓸히 숨졌다. 맥락은 다르지만 시도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십대들은 ‘한명씩 자신의 골방에 은폐되어 고립’될 거라고 한 저자들의 말이 떠올랐다. 이젠 노인, 중장년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고독사까지도 걱정해야 한다.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큰애는 알바를 할 생각에 모든 강의를 사흘로 몰았다.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큰소리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과는 줄줄이 낙방이다. 법정 최저시급보다 900원 더 준다는 곳에 청년들이 우르르 몰렸는데 스펙은 물론이고 절박함에서도 다른 젊은이들을 제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괜히 강의만 몰아두어 저녁 늦게야 수업이 끝난다. 쏟아지는 잠을 쫓느라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 값도 만만찮아 집에서 커피를 끓여 간다. 춘곤증에 좋다는 생과일주스는 아예 꿈도 못 꾼다. 샌드위치와 가격이 맞먹는다. 아무도 찾지 않아 학교 매점에서 사라진 지 오래라고 한다.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비용도 신경쓰이는 눈치다. 역시 ‘썸’을 탈 때가 좋았다는 말은 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자신은 학자금 대출이 없어 다행이라면서 자꾸 엄마 눈치를 본다. 언제부턴가 취업해 빨리 독립하겠다는 말도 쏙 들어갔는데, 눈치가 빤한 초등학생 둘째도 덩달아 자신은 엄마 옆에 딱 붙어 살 거라고 공언 아닌 공언을 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딱 ‘웃픈’ 상황이다.

왜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지 않느냐고, ‘만약 20대 1만명 정도가 스타벅스에 가기를 거부하고 20대 사장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와 차를 마시겠다고 선언’한다면 달라질 거라고 큰애에게 책 속의 이야기를 꺼냈다가 무안해졌다. 한때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대다수의 학생들은 커피 한잔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그곳을 선호한다. 20대 청년이 창업한 가게는 규모가 작아 오래 죽치고 앉아 있을 공간이 부족할 게 뻔하다. 눈치가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사장 입장에서도 그렇게 하다간 하루에 손님 몇명 받지 못할 것이다.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이번에 발표된 신어 가운데서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는 열 개로 그중 부정적인 어휘는 ‘노관심’, ‘극혐오하다’ 둘뿐이다. 의외의 결과에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봐야 할 듯하다. 본능적으로 부정을 뜻하는 모든 것들을 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이 말뿐이라 하더라도. 이미 충분히 아슬아슬한 삶을 살고 있으므로.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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