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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백년 전 입시 / 권보드래

등록 2015-05-22 18:37

이 땅에서 과거 제도가 사라진 건 1894년이다. 천지가 뒤집혔던 갑오개혁 때다. 그러나 그 후로도 십년, 이십년, 과거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이 많았단다. 고려 때부터 치면 과거제가 시행된 지 천년 가까웠으니 왜 아니었으랴 싶다. 적잖은 사람들이 조만간 과거가 부활하리라 믿고 사서와 삼경과 시와 역사를 골똘히 공부했다고 한다. 미련이 정리된 것은 대략 백년 전쯤으로 보인다.

천년은 고사하고 백년만 거슬러 생각해도 지금 이곳의 삶은 낯설어 뵌다. 내가 사는 동네는 고종과 순종의 능 주변이다. 1919년 고종의 장례를 지낼 때는 수만의 국장 배관객이 몰려들어 고작 20~30호였던 동리가 무척 떠들썩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 가까운 고갯마루에서 인근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미금면 평내리에서 금곡리로 가는 둘째 번 고개”, 박아무개네 주막 앞에서였다.

강남 봉은사 앞을 지날 때면 <귀의성>이 떠오른다. 이인직의 <귀의성>에서 서울로 첩살이 온 길순이 살해당했던 곳이 봉은사 인근 골짜기다. 그때만 해도 도성(都城)을 나와 강을 건너 한참 가야 하는 산속이었다. 서울서 과천 넘어가는 남태령은 1910년대까지도 호랑이가 나왔다는 소문이 가끔 들렸다. 길 걷다가도 자주 생각한다. 지금 여기는 백년 전 어떤 곳이었을까, 백년 후엔 어떻게 돼 있을까.

백년 전만 해도 학교는 별 수요가 없었다. 몇몇 관립학교에 입시 경쟁이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대부분 지역에선 학생을 채우지 못해 쩔쩔맸다. 어지간한 집에선 곡식자루 들리고 이불보따리 지워 아이들을 서당에 보내곤 했다. 입시 경쟁이 일반화된 건 3·1 운동 이후다. 학교 가야 출세한다는 믿음이 퍼지면서 입시열은 점점 과열됐다. 박태원은 <채가>에서 마침내 유치원 입학까지 시험을 봐야 하는 세태를 묘사해 낸 바 있다.

학력주의는 한국인이 경험해온 확고한 진리다. 명문교를 나와야 취직하고, 출세하고, 살아남는다. 전쟁 때도 대학생은 봐주지 않았던가. <레디메이드 인생>식 실업 지식인의 우울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덕분에 한국전쟁 후 대학은 더 기세 좋게 뻗어나갔다. 고교 입시 시스템을 지나, 본고사와 학력고사 세대를 거쳐, 난해하디난해한 2010년대의 입시제도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짧게 치면 오십년, 길게 잡아도 백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불안할수록 질주하는 것도 법칙인가 보다. 대학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건 다 인정한다. 명문대 나오면 삶이 안전하리라는 기대가 허구화되고 있다는 사실도 대개 안다. 한편에선 그럴수록 ‘좁은 구멍’을 향한 경쟁이 과열된다. 큰애가 중학생이 되고 나니 이 판에서 꿋꿋이 버티기가 쉽지 않단 사실을 더 실감나게 알겠다. 옆에서 뛰니 덩달아 불안해진다. 학원 입구를 서성거리게 된다. 다들 그런다는데, 중얼거린다.

오래잖아 손들기 십상이겠다. 그럼 누군가 나까지 넣어 가리키며 말하리라. 다들 그러잖아. 버텨 보려고 자주 백년 전을 생각하지만, 그것도 늘 좋은 일은 아니다. 다정한 유령과 마찬가지로 백년이란 세월도 빈번하게 불려 나오면 현재를 좀먹는다.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할 텐데, 용기가 꺾인 마음은 현재에 주저앉고 기껏 과거에서 위안을 찾는다.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자식 키울 때도 결국 필요한 건 용기인가 보다. 위안과 격려도, 다시 걷기 위해, 용기를 내기 위해 필요한 계기일 뿐. 현재에 지지 않고 과거로 물러서지도 않고 싶은데. 매일 사소한 양의 용기가 필요하다. 나 혼자로선 부족한, 누군가 손잡아야 할.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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