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북한 방문 계획을 밝혔다가 뜻이 무산되는 우여곡절을 겪고 엊그제 뉴욕의 유엔 사무실로 돌아갔다. 요란하게 입국했다가 빈손으로 돌아갔다는 둥 반기문 대망론에 금이 갔다는 둥의 해석이 나온다.
반 총장 쪽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한국인 출신 ‘세계 정부 지도자’로서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해 분단 극복 의지를 부각시킨다는 의미를 애초에 내세웠다. 문제는 한반도 상황이 엄중한 것과 달리, 어려움을 무릅쓰고 몸을 던진다는 묵직함이 반 총장한테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 총장은 5월18~22일 인천과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교육포럼, <조선일보> 주최 포럼, <에스비에스> 주최 포럼에 잇달아 참석하던 중에 불쑥 개성공단 방문 일정을 발표했다. 초청받은 온갖 행사에 두루 인사치레를 하고 나서, 딸린 일정처럼 북한 방문을 끼워넣는 모양새였다.
개성 방문의 내용은 더 의아스러웠다. 개성공단에서 “기업체들을 방문하고 북측 근로자들도 만나보고 격려할 생각”이라고 반 총장은 말했다. 1시간30분쯤 머물 계획이라고 우리 외교부는 설명했다. 개성에서 유력한 북쪽 고위 인사를 만나 중요한 대화를 한다는 계획이 애당초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 기업인들은 개성에 가지 않고 남쪽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조업 현장을 둘러보고 격려하는 것은 공단을 찾는 외국 바이어들도 보통 하는 일이다. 북한이 반 총장의 방북을 허가했다가 뒤집은 것은 잘못이지만, 방북을 하더라도 폭발적인 내용은 없었던 셈이다.
유엔 사무총장이 일 좀 해보겠다는 생각이면 개성이 아니라 당연히 평양을 가겠다고 해야 옳았다. 거기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만나 핵 문제가 됐든 5·24 조치가 됐든 한반도 긴장의 원인과 해소책을 깊이 논의해야 했다. 반 총장이 방북에 앞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미리 만나 대북 태도 수정 가능성을 타진했다면 더욱 좋을 뻔했다. 한반도 갈등을 해소하려면 남북한과 미국 등의 당사자들이 한 걸음씩 양보하는 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때 북한을 전격적으로 찾아 김일성 주석과 만났다. 이를 통해 미국이 핵개발을 문제 삼아 북한 지역을 폭격하려던 극단적 대결 분위기를 대화 국면으로 돌리는 평화 전령 노릇을 톡톡히 했다. 유엔의 2대 사무총장인 다그 함마르셸드(1953.4~1961.9 재임)는 몸을 사리지 않고 분쟁지역들을 돌며 중재활동을 펼쳐 유엔의 권위를 높였다. 함마르셸드는 1961년 콩고 내전을 중재하러 가다 비행기가 추락해 숨졌고, 사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반 총장의 이번 행보는 실체가 약한 언론용 이벤트라는 느낌을 많이 줬다.
반 총장은 방북이 무산된 뒤 청와대로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했다. 박 대통령과 반 총장은 북한 정권의 비이성적인 태도를 납득할 수 없다며 입을 모아 북한을 성토했다.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유엔 사무총장이 미국과 박근혜 정부의 손바닥 안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였다. 함마르셸드 총장은 미국의 입김이 절대적인 유엔 창설 초기에도 유엔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서만 움직이지 않도록 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5월22일치 <동아일보> 뉴욕 특파원의 글을 보니, 반 총장은 평소에 엄청나게 많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각종 출장과 기자회견, 회의 주재는 물론이고 뉴욕을 찾은 한국 정치인과 고향 사람들, 재미 동포들을 두루 만나주고 한국에서 온 영상 메시지 요청도 알뜰히 챙긴다고 한다. 그런데 외신들은 반 총장을 ‘존재감이 없는 사람’(invisible man)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반 총장이 평화 지도자로서의 자기 색깔을 더욱 선 굵게 보여주면 좋겠다. 모처럼의 방북 추진이 해프닝으로 마감되니 뒷맛이 좀 그렇다.
박창식 논설위원 cspcsp@hani.co.kr
박창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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