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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말 같지 않은 말들’이 춤추는 세상

등록 2015-06-03 19:05

국회법 개정안을 둘러싼 작금의 혼란상은 ‘말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휘어지고 뒤틀린 언어, 회칠과 분칠을 한 언어, 가면을 뒤집어쓴 언어들이 어지럽게 춤춘다. 한마디로 말 같지 않은 말들이 곳곳에서 굉음을 내고 있다.

가장 기초적인 용어인 ‘행정입법’이라는 말부터 그렇다. 이 말은 delegated legislation(위임입법) 또는 subordinate legislation(종속입법)을 ‘의역’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위임된 입법업무를 주로 수행하는 기관이 행정부라서 그런 번역이 나온 듯싶지만, 용어의 뉘앙스는 천양지차다. 행정입법이라는 말은 마치 행정부가 고유의 독자적인 입법기능을 갖고 있는 듯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행정입법권 침해니 뭐니 하며 행정부의 ‘천부적 권한’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모습까지 보노라면 ‘언어 바로 세우기’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입법 독재’라는 말의 허황됨은 더 심각하다. 영문 표현으로는 legislative dictatorship(입법에 의한 독재) 내지는 parliamentary dictatorship(의회 독재)쯤이 되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이 말은 ‘다수당의 횡포’를 뜻하는 말이다. 영국의 정치인인 퀸틴 호그(헤일셤 경)가 1976년 <비비시> 방송에 나와 언급한 뒤 자주 인용되는 ‘선출된 독재’(elective dictatorship)란 말도 있으나, 이것 역시 ‘하원 다수당이 내각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면서 내각의 폭주가 일어나는 현상’을 가리킬 뿐 보수언론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입법독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 용어는 수직적 당-청 관계 속에서 여당이 ‘통법부’ 선봉에 서는 우리 현실에 더 적합한 말이다. 이런 언어 불일치의 이유는 자명하다. 정당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현대 정치 체계에서 여야가 힘을 합쳐 상시적으로 독재를 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식물 정부’라는 말은 또 어떤가. 국회선진화법을 헐뜯으며 줄곧 ‘식물 국회’를 비판하던 사람들이 ‘식물 정부’까지 운운하는 것을 보면 드디어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식물 공화국’이 될 모양이다. 비유법이라는 게 과장을 내포하기 마련이지만 식물 정부의 과장과 엄포는 도를 넘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방역 대책 실패에서 드러난 것처럼 판단력 ‘뇌사’ 상태의 정부의 무기력증이 과연 시행령 문제 때문인가. ‘행정입법권 침해’니 ‘입법독재’니 하는 교묘한 언사로 국민을 현혹하는 것이 사기죄에 해당한다면, ‘식물 정부’라는 가상의 현실을 들이밀며 으름장을 놓는 것은 국민에 대한 공갈협박죄에 해당한다.

‘식물’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덧붙이자면, 시행령을 가지고 교묘한 장난을 하는 행정부의 행태는 지극히 ‘동물적’이다. 권력의 뜻을 살피려고 눈알을 번득이고, 정치적 후각을 발동해 코를 벌름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집단을 물어뜯으려고 이빨을 드러내는 모습이 영락없이 동물의 그것이다. 행정부의 이런 동물적 행태를 고려하면 위임입법 문제에 관한 한 차라리 어느 정도의 ‘식물화’가 필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국회법 개정을 촉발시킨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에 대한 정부의 농간을 보면 그림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모법에 아무런 위임 규정이 없는데도 진상조사의 핵심 업무를 조사1과에 몰아주고 과장을 검찰 공무원으로 임명하도록 한 의도는 자명하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의 초점은 결국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의 초기 대응 부실에 집중될 수밖에 없고, 그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7시간 미스터리’ 등 박근혜 대통령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어떻게든 그것을 피해보자는 것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그렇다면 박 대통령이 지금 거부권 행사까지 거론하며 국회법에 강력히 반대하는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서’. 그런 의혹을 피하고 싶다면 우선 세월호특별법 시행령부터 고치고 그 뒤에 ‘시행령 일반’의 문제를 따로 논의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 가면의 언어를 벗어던지자.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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