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든 식물이든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 자기 운명을 정하지 못하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자기가 태어날 자리, 환경이다. 나무든 풀이든 사람이든 누구나 자라기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싶지만, 그거야말로 태어나는 자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경우 태어나고 보니 벽촌의 가난한 집안일 수 있고, 어느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보니 커다란 바위틈일 수 있다. 태어나는 생명은 환경 선택권이 없다. 그러나 그런 바위틈에서도 비바람을 이겨내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란다.
고향 마을 제방둑에 가면 10미터 간격으로 미루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아주 오래전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 손으로 심었으니까 그곳에 심어진 지 45년쯤 된다. 처음 심을 때엔 손가락 굵기의 아주 어린 묘목이었다.
그 제방은 애초 작은 논둑이었다. 그래서 여름마다 개울이 넘쳐 어느 해인가 그곳에 둑을 쌓았다. 예전엔 마을마다 둑을 쌓을 때, 또 새롭게 길을 만들 때 품삯 대신 ‘사팔공 밀가루’를 주었다. 그 밀가루는 미국에서 온 것이고, 밀가루 포대에 태극기가 그려진 팔뚝과 별이 쉰 개나 된다는 성조기가 그려진 팔뚝이 악수하는 그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이 양곡은 미국 시민이 우방국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원조하는 것으로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당시 미국 어느 법의 480조가 바로 ‘우방국가에 대한 잉여농산물의 원조에 관한 조항’이라고 했다. 그래서 밀가루도 ‘480 밀가루’이고, 둑 이름 역시 ‘사팔공 제방’이다.
한 해 봄부터 가을까지 어른들이 둑을 쌓고 우리가 거기에 나무를 심었다. 그 나무가 어른의 몸보다 굵어졌다. 10여년 전 영동지역을 휩쓸고 지나간 루사와 매미 태풍 때의 엄청난 수해에도 둑은 무너졌어도 그 나무들은 굳건했다. 얼핏 생각하기엔 물가에 있는 나무들일수록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어 꾀를 부려 산에 있는 나무보다 뿌리를 얕게 뻗고 말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물가에 서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산에 있는 나무들보다 더 깊고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기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비바람에 늘 맥없이 뿌리째 뽑혀 나오는 건 산도 물가도 아닌 길가에 심은 나무들이다.
나무들의 잎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띠는 것도 바로 유월이다. 사월과 오월엔 아직 잎을 다 키우지 못했고, 조금 지나 한여름이 되면 비바람에 상처도 많이 입고, 또 한낮의 모진 태양 아래 가죽처럼 잎이 뻣뻣해지고 만다.
어린 날 우리는 그 나무를 심으며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이 나무들이 얼마나 크게 자랄까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그렇게 크지 않던 나무들이 대처에 나가 대학을 다니고 군에 다녀왔을 때, 그리고 한해 한해 명절에 방문할 때마다 깜짝 놀랄 만큼 몸이 커진 채 내가 떠나 있는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향에 갈 때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심은 나무에 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도록 고향을 떠나 있는가를. 그리고 그 시절로부터 우리는 또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를.
그것은 한 아이가 시골 초등학교 교실에서 몽당연필로 글씨를 쓰다가 어른이 되어 컴퓨터로 글을 쓰고, 그가 어린 시절 물가에 심은 손가락 같은 나무들이 어른이 된 그의 몸보다 더 굵어지는 동안의 시간이다. 그 안에 참으로 많은 도구의 변화와 문명의 변화가 있었다. 자연 속에서도 세상은 변해간다.
이순원 소설가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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