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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표절 권하는 사회 / 권보드래

등록 2015-06-19 19:15

요즘 같은 학술·문화적 환경에서 표절은 논리적 결과다. 한 10여년, 표절 소문은 참 많기도 했다. 누구는 외국 책을 통째로 베껴 책을 냈고, 누구는 후배 아이디어를 훔쳐 학위를 받았으며, 누구는 이 논문 저 논문을 짜깁기했다고 했다. 소문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내 글이 표절된 걸 본 경험만 해도 여러 차례다.

한번도 문제 삼은 적은 없다. 발표문을 통째로 옮겨놓다시피 한 논문도 봤지만, 자연히 도태될 텐데 뭘 시끄럽게 시비를 걸랴 싶었다. 자기 글이 표절당한 걸 발견한 선후배들이 조언을 구해 올 때도 그냥 넘어가라고 권하곤 했다. 문제를 속속들이 박멸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때문이기도 했고, 그냥 게으르고 비겁한 까닭이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은 철저한 성과주의 사회다. 문제는 성과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평가할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자연히 손쉬운 정량주의가 지배한다. 논문 편수는 많을수록 좋고, 돈은 듬뿍 끌어올수록 좋고, 행사는 자주 열수록 좋다. 그 반면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연전에 어디서 신임 교원을 뽑는데 1년에 열 편쯤 논문을 발표한 사람이 몇 지원했다고 들었다. “에? 그럼 그것만으로도 결격 사유 아녀요?” 꼭 농담만은 아니었는데 다들 웃었다. 1년에 열 편이라니. 그러나 취직하고 승진해야 하는 처지에서는 절치부심 편수를 늘리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질은 떨어지고 자긍심은 낮아진다.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이 늘어난다.

한국 사회에서 자발성의 동력이 다 떨어져 간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서류는 잔뜩 오가지만 실제는 초라하다. 논문은 무더기로 쌓여 있으나 다 그만그만하다. 전형적인 하향평준화다. 하고 싶어 한 일이 아니라 남 눈치 보느라 한 일인 까닭이다. 말릴 수 없이 성실한 사람들마저 마침내 이 둘 사이에서 착란을 경험한다. 하고 싶어 한 일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 보니 경쟁과 감시에 쫓긴 결과더라는 그런 식이다. 그래서 이제 표절은 삼류 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방임으로 정책 방향을 돌리면 어떨는지 생각해 본다. 논문, 쓰고 싶은 사람만 쓰면 된다. 행사, 하고 싶은 사람끼리 열면 되고, 강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투자하면 된다. 논문 편수가 줄고 휴강이 늘겠지만, 쓸데없는 논문이 쌓이고 뜻도 없는 강의가 빼곡한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종이와 우송료를 아끼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밖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을 만한 뚝심과 자율성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초등학교 5학년 땐가 집 앞에 붙어 있는 불조심 포스터를 베껴서 내 것인 양 낸 적이 있다. 다행히 친구들이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그 이듬핸가는 서술식 시험문제 하나가 영 요령부득이라 앞자리 반장 답을 흉내 내 적었다. 공교롭게도 문제가 잘못됐다며 전원 정답 처리를 해 줬다. 그때 들키지 않고, 그때 부당 이익을 올렸다면 내 인생은 조금쯤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표절은 주변부에서 시작되기 쉬운 행태다. 경쟁이 더 치열하기 때문이다. 비효율을 최소화하자는 게 성과 평가의 목표지만, 그 칼날은 번번이 기득권자를 피해 비정규직을 겨눈다. 그렇다고 기득권자가 사는 문안이 마냥 안전한 것은 아니다. 안전지대가 점점 좁아지는 만큼 위기감은 안팎 없이 만연해 있다. 이미 표절로 구축한 시스템이다. 책임질 주체가 없다. 발밑이 꺼졌을 때 함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힘은 시시각각 소멸해 가는 중이다. 최근의 표절 논란은 그래서 더 착잡하다.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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