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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웃는 얼굴에 침 뱉기 / 정아은

등록 2015-06-26 18:36

외출했다 돌아오는데 눈앞에 갑자기 만원짜리 몇장이 나타났다. 빳빳한 새 돈! 오옷, 냉큼 그것을 받아들려다가 흠칫 멈춰섰다. 세상에 대가 없는 돈은 없는 법이지. 현금을 쥐고 있는 손을 따라가보니 오십대 후반쯤의, 그리 풍요로운 삶을 누렸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아저씨가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면서, 나는 알았다. 신문 아저씨구나. 그는 십만원의 현금과 일년치 무료구독권을 제시했고, 나는 잠깐 솔깃해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지금 보고 있는 신문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침착하게 말한 뒤 다시 걸어가는데 그가 뒤쫓아왔다. 무슨 신문 보는데요? A일보? B일보? 집요하게 물어오는 그에게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신문 안 본다니까요! 그는 놀란 듯 멈춰섰고,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작업을 하다가 저녁거리를 사려고 집 근처 마트로 향했다. 장을 본 뒤 양손에 비닐봉지를 잔뜩 들고 건널목을 건너려는데, 신호등 옆에 파라솔을 치고 모여 있던 여자들 중 한명이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수학 학습지 한번 받아보세요. 지금 등록하시면 행사기간이라 특별히… 여자는 화려한 색상의 전단지와 연필 한자루가 들어 있는 비닐 꾸러미를 건네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괜찮습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런 걸 받아서 버릴 때마다 환경에 죄책감을 느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절대 받지 말아야겠다는 의기가 솟아올랐다. 꼭 신청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받아 가세요. 연필 선물도 챙기시고요. 여자가 내게 바짝 붙어서며 비닐 꾸러미를 내밀었다. 여자를 피하려 비켜서는데,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비닐봉지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허리를 굽혀 비닐봉지를 주워 올리며 여자를 쏘아보았다. 안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내 날카로운 반응에 놀란 여자가 눈을 몇번 깜빡이더니 엉거주춤 물러섰다. 마침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얼른 횡단보도를 건넜다.

깜빡 잊고 사지 않은 야채가 있어 다시 마트에 들렀다 오는 길, 파라솔 근처에 가기 싫어서 옆 단지로 우회했다. 건너편으로, 조금 전에 내게 무안을 당했던 여자가 웃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단지를 건네고 있는 게 보였다. 그쪽을 쳐다보다가, 여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아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집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내게 다가오거나 뭔가를 건네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저녁을 지어 아이들 배를 불린 뒤 한동안 지지고 볶다가 아이들을 재웠다.

정아은 소설가
정아은 소설가
아이들이 꿈나라로 간 밤 시간, 노트북을 켜고 못다 한 작업을 마구마구 해치운 뒤 잠자리에 들었다. 누워서 닥쳐올 휴식을 달콤하게 예감하는데, 신문을 권하던 아저씨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검은 뿔테 안경, 기미로 뒤덮인 검붉은 얼굴, 피곤한 얼굴에 열심히 지어 보이던 억지웃음. 뒤이어 사근사근하게 다가오던 학습지 회사 직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스크도 끼지 못한 채 여기저기 말을 건네던 여자의 모습이. 옅은 죄책감과, 현 세태에 대한 짜증이 밀려왔다. 왜 멀쩡한 사람을 남한테 침 뱉게 만들어? 이건 내가 나쁜 게 아니라 상업주의가 심한 이 시대가 잘못된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잊으려 했지만 찜찜함은 가시지 않았다. 어쨌든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은 행위자는 내가 아니었던가. 음. 나는 한동안 찜찜해하다가, 앞으로는 그런 권유를 뿌리칠 때도 좀 친절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잠을 청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알고 있었다. 내가, 며칠 지나지 않아, 또 웃는 얼굴에 침을 뱉게 되리라는 걸.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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