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집 아기>와 <여우 누이>. 아직도 가끔 둘째가 잠자리에서 불러달라는 노래요 읽어달라는 책이다. 흥얼흥얼… “못다 찬 굴바구니 / 머리에 이고 /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토닥토닥. “아이고 분해, 아이고 분해. 말 한 끼 사람 한 끼 / 두 끼 거리 도망가네!” 가락을 맞춰 부르고 읽다 보면 나도 어쩐지 토닥토닥.
첫째와 둘째 다 잠트집이 심했다. 포대기로 업은 채 서성서성, 한 시간 가까이 달래 재워야 할 때가 많았다. 갓난아이란 대개 그렇지만 부모로선 고역일 수밖에 없는데, 그 시간에 자연히 필요한 게 자장가였다. 자장가는 애들에게도 필요했지만 내게도 필요했다. 노동요 격이랄까. 한데 음악이고 노래고 아는 밑천이 짧은 터라 도통 부를 만한 곡이 없었다.
“잘 자라 내 아기 / 내 귀여운 아기 / 아름다운 장미꽃….” 컥. 오글거리는 건 관두고 장미꽃의 난데없는 이국성이라니. 설총의 <화왕계>를 기억하는데도 내 세포 속 어딘가서 장미는 서양 꽃이야, 고집을 부렸다. “… 스텐카라친 배 위에서 / 노랫소리 들린다…” 얼씨구, 17세기 러시아는 더 가깝다는 거냐? 후진국 동병상련? “헐벗은 내 몸이 / 뒤안에서 떠는 것은 / 사랑과 미움과 믿음의 참을…” 터무니없는. 버젓한 아파트에서 제 새끼 재우면서 헐벗었다니 가당키나 한가?
주로 <스텐카라친>과 <두리번거린다>를 불렀지만 어딘가 뜨악했다. 어머니를 졸라 자장가를 배웠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자장가는 “…나라에는 충성둥이 / 부모에는 효자둥이 / 형제에는 우애둥이…” 등이 이어지는 자못 퇴영적인 가사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의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할 곡조는 이 땅에서 수백년 묵은 것이어야 할 것 같았다. 어느 날 까닭없이 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리운 가락, 세상이 휑할 때 그래도 사지를 꿈적거리게 해줄 정체불명의 흥얼거림.
결국 진부하게도 <섬집 아기>며 <여우 누이>로 낙착됐지만 잠들 때 노래며 이야기에 대한 꿈은 여전하다. 그 꿈속에는 실제론 겪어보지 못한 자애로운 할머니가 산다. 쪽 찐 머리에 은비녀 꽂은 그 할미에게 나는 언제나 “우리 강아지”고, 밤이면 어둑한 빛 아래 할미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긴 얘기를 들려주곤 한다. 농경사회의 미점(美點)을 압축해 놓은 이 장면은 마치 전생처럼, 그립고도 아련하다.
실재보다 환상에 가까운 이 과거는 저문 지 오래다. 그런데도 나를 온전히 품어줄 존재를 그리워하는 유년기적 충동은 과거의 환상이나마 날조해 내는가 보다. 다치고 배우고 타협하면서 수십년을 살았건만 자아는 여전히 가상 속 할머니의,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한다. 배운 적도 없는 자장가를 기억해 내려 안타깝게 입술을 오물거려 보곤 한다.
등짝을 후려치는 손이, 어깨에 내리꽂히는 죽비가 간절할 때가 있다. 이 못지않게, 누군가의 전면적 지지를 갈망케 될 때도 있다. 박사과정에 들어와 첫 발표를 했을 때인가 보다. 엉망진창인 글을 발표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데 어떤 선배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넌, 이것보다 백 배는 나은 글을 쓸 수 있어.” 그 전에도 후에도 결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나 그때 전해 받았던 위안과 용기는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자장가는 끝내 기억나지 않아도 그런 순간 때문에 한동안을 버틸 수 있었겠거니.
내 아이들은 <섬집 아기>와 <여우 누이>를, 혹은 <스텐카라친>이나 <두리번거린다>를 기억할까. 꾸중하고 다그치는 걸로 하루를 보낸 후 밤이면 종종 생각한다. 벗들에게, 제자들에게도, 나도 가끔은 자장가의 선율이 되고 싶지만.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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