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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그 죽음에 관한 인간적인 의문 / 박용현

등록 2015-07-23 18:52

박용현 논설위원
박용현 논설위원
나는 정보기관 요원처럼 사선을 넘나드는 일에 종사해본 적이 없어서 임박한 죽음 또는 그 가능성의 순간에 직면해본 경험이 없다. 그러니 그때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오인으로 빚어진 우스꽝스런 해프닝이었지만, 나름 가슴을 쓸어내렸던 체험이 있기는 하다. 아프리카에 취재를 간 어느 날 속이 메스껍고 심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말라리아 감염이란 의심이 들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두려움은 계속 불어났다. 그 공포의 99% 이상은 귀엽디귀여운 아들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절망, 아내와 아들을 세상에 던져두고 떠날 수도 있다는 한스러움이었다. 말 그대로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가는 가족의 정지화면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국가정보원 직원 임아무개씨의 자살 소식은 경위서를 연상시키는 유서가 공개됐을 때만 해도 과거에 여러차례 있었던 국정원 직원의 자살(시도)처럼 건조한 사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가족에게 남긴 유서가 공개된 순간, 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내 연배인 그의 나이, 45라는 숫자가 눈에 다가들었다. 유서를 읽어내려가며 눈시울이 뜨뜻해졌다. 아프리카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실제 죽음에 직면해 있었고, 나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았다. 아내도 더 사랑하는 것 같았다. “나의 희망이었고 꿈이었”던 큰딸과 “웃는 모습이 예쁜 우리 아기”인 고3 둘째딸,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고픈 아내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스쳐간 주마등은 천길 만길 이어졌을 것이다.

아프리카 출장 이후 나는 젊은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다고 믿게 됐다.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일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족에게 저리 애틋한 편지를 쓰는 아버지라면 결코 쉽게 자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물론 이 땅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많은 아버지들의 비극이 있다. 그들도 하나같이 가족을 사랑했을 것이다. 유혹하는 죽음을 온힘을 다해 밀어내려 했을 것이고, 막장 같은 궁지에 몰렸더라도 불도저처럼 돌파하려 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게 무너져 내리더라도, 껍데기뿐인 생이라도 붙들어 가족과 함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강철같은 의지를 끝내 내려놓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어떤 곤경이며 어떤 파멸일까? 살아남아도 더 이상 가족을 돌볼 수 없을 것이라는 극단의 절망일까?

국정원의 해명대로, 또한 임씨가 유서에서 밝힌 대로 해킹 프로그램 도입과 사용이 정당했다면 그에게 저런 극단의 상황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임씨가 이번 일로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해킹 프로그램과 관련해 외부와 연락하면서 실수로 보안사항을 누설하는 잘못을 범했을 가능성도 점쳐지지만, 그게 과연 임씨를 극단의 파멸로 몰아갈 일인지 의문이다. 임씨가 최고 강도의 내부 감찰인 ‘보안조사’를 받았다고도 하고, 국정원이 감찰 과정에서 임씨의 부인과 큰딸에게까지 연락을 했다는 보도도 나온다. 국정원 쪽은 모두 부인한다. 오리무중이다. 진실은 국정원 울타리 안에 꽁꽁 숨겨져 있다.

다만 움직일 수 없는 사실 하나는 그의 유서다. 무미건조한 이름의 국정원 직원이 아닌, 한 아버지로서 남긴 유서에 이끌려 가다 보면 그의 죽음에 관한 인간적인 의문에 당도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를 남기고 마흔다섯살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극단의 상황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런 게 있기는 한 것일까? 이 처연한 비극의 내막은, 해킹 의혹과는 별개로, 분명히 규명돼야 한다. 그것이 평생 나라를 위해 일한 한 아버지를 애도하는 길이며, 이렇게 아버지를 잃는 가족이 더는 나오지 않도록 하는 길이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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