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업적에 대한 학계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다. 2000년 <월스트리트 저널>이 저명한 정치·법·역사학자 13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대 대통령 종합평가를 보면, 그는 5점 만점에 평점 2.47로 ‘평균 이하’였다.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오른 이는 조지 워싱턴(평점 4.97), 에이브러햄 링컨(4.87), 프랭클린 루스벨트(4.67) 셋뿐이었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역대 가장 저평가된 대통령’ 부문에서도 카터는 7위에 올라 있다. 학자들이 꼽은 카터의 가장 큰 업적은 ‘인권 외교’다. 카터는 상대국의 인권을 대외정책과 연계시킨 첫 대통령이었다. 1970년대 초 미국 대외정책을 총괄했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다른 나라의 국내문제를 미국 외교정책의 직접적인 목표로 설정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밝혔다. 카터 이전엔 이것이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이었다.
카터는 1976년 대선 과정에서 ‘인권에 기반한 대외정책’을 강조해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에 이익이 되면 동맹국의 독재권력을 눈감아주던 관행엔 제동이 걸렸다. 카터는 이란, 필리핀, 니카라과 등 주요 우방국에 인권 상황을 개선하라고 압박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9년 6월29일 서울에서 열린 박정희-카터 회담은 국내 인권 및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양쪽이 충돌한 역대 가장 심각했던 한-미 정상회담으로 기억된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180여명의 양심수 석방을 발표했다.
이젠 ‘인권과 외교를 분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인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올해 아흔한살인 카터 전 대통령이 지난주 ‘암이 뇌에 전이됐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편안하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 포스트>는 사설에서 “그는 퇴임 후 대통령 활동의 귀감이었고, 끝까지 조용한 용기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세계에 수많은 전직 대통령이 있지만 이런 찬사를 받는 이는 드물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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