큭, 크흑, 크흐흐흑. 과학잡지를 읽다가 숨죽인 채 웃고 말았다. 한 시절 유행했던 염소소독이 왜 그리 독한 냄새를 풍겼는지를 다룬 기사다. 통념과는 달리 염소 자체는 무색무취하단다. 수영장에 들어설 때 나던 그 싸한 냄새를 풍기는 약품이 아니라는 거다. 예의 그 냄새는 염소와 인체 분비물이 결합해 나는 냄새란다. 결론인즉 수영장 내 방뇨를 삼가라는 말씀.
정보 원천으로 돼 있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니 수영장 에티켓을 다룬 귀여운 전단이 달랑 뜬다. 별다른 근거 제시는 없다. 염소, 즉 클로린은 원래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물질 아닌가? 기체화된 상태에선 황록 빛깔도 띤다고 돼 있는데? 염소계 표백제를 열 때 나는 그 냄새도 설마 분비물과의 혼합 결과란 건 아닐 테고? 터무니없이 진지해지다 결국 갸우뚱하고 말았지만, 웃음기가 다 가시진 않았다. 소변 냄새라. 큭큭.
“너희는 그런 적 없지?” 애들에게 물었더니 뜻밖에 둘 다 경험이 있단다. “엥? 언제?” 갑자기 나왔다고요. 그땐 어렸다고요. 항변을 들으며 생각해 보니 취학 전 애들 데리고 목욕탕 다닐 무렵 수챗구멍에 오줌 뉜 적도 여러 번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목욕탕에서든 수영장에서든 화장실 아닌 데서 볼일 본 일 절대 없노라? 그런 분도 분명 있긴 할 테지만.
수영장의 간디와 욕장 안 히틀러를 공상한다. 어린 시절 한번쯤 찔끔, 했을 숱한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큭, 크흑, 크흐흐흑. 좀체 발각되지 않는 그런 귀여운 악덕으로 구성된 세계를 상상한다. 그러다 <잃어버린 지평선>이 떠오르고 <악의 꽃>이 생각난다. 이런, 생각이 또 거창해진다. 모처럼 웃은 보람도 없이. 쯧쯧.
“인간이 진정 욕망하는 것은 악이다”, 아마 보들레르. “이곳 주민들은 적당히 진지하고 적당히 순수하며 적당히 정직합니다”, 이건 확실히 힐턴. <잃어버린 지평선>은 이상향 격인 샹그릴라를 제시하지만 그건 플라톤이나 모어 식의 유토피아와 크게 다르다. 플라톤이나 모어가 완벽하게 정의롭고 덕스러운 공동체를 꿈꾸었다면, 제임스 힐턴은 ‘적당히’ 모범적이고 행복한 쪽을 추천한다.
“적당히 합시다, 적당히.” - 이 말의 위험성을 싫도록 목격하면서 살아오긴 했다. 권위적 압박이나 굴종적 타성이 클 때 ‘적당히’란 ‘다쳐, 조용히 해’나 ‘잘났어, 정말’의 다른 버전이기 쉽다. ‘적당히’를 거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기 이르지 못했으리라. 흑백의 선택이 강요될 때 중용이란 비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다.
지금도 그런가? ‘적당히’의 긍정적 활용법을 시험할 때도 되지 않았나? 옳다는 자기확신이 어떤 문제를 빚어내는지 충분히 목격하지 않았으려나? 그런 생각이 살금 들기 시작한다. 불의에 맞서 싸운다는 의식은 절로 나의 정당성을 보장하겠으나, 내 안에 들끓는 사소한 악덕들은 어떻게 처분한다지? “인간이 진정 욕망하는 것은 악”이란 말 또한 일말의 진실을 실어나르고 있을진대.
인간은 잘못 없이 살 수 없다. 오류 없이 결코 자기 자신일 수 없다. 어떤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특유의 결점과 문제, 또한 그것과 더불어 살아갈 때의 독특한 자세다. “차라리 내게 거짓말을 해 봐!”라고 도스토옙스키는 압박했지만, 진정, 내 것이 아닌 정의와 더불어 살기보다 나 자신의 거짓말 속에서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적어도 우리는 한때의 악동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맴돈 끝에 오늘은 기껏 거대한 수영장을 상상하고 말지만.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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