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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강인한 사람들, 박근혜·김무성·박원순… / 박용현

등록 2015-09-15 18:36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일부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판결은 의미심장하다. 선거 때 상대 후보인 고승덕 전 의원에 대해 △‘미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 것과 △‘그런 의혹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 것을 구분한 게 핵심이다. 혹자는 ‘기교적’ 판결이라고 비판하는데, 엇비슷해 보이는 현상들에서 본질상 다른 측면을 분리해 각각에 맞는 법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법률적 추론의 기본이다.

마침 이런 구분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사위의 마약 사건이다. 김 대표가 대선 후보라고 가정해보자. ‘김 대표의 영향력으로 부실 수사와 봐주기 재판이 이뤄졌다’고 주장하려면 “그런 사실의 존재를 수긍할 만한 소명자료를 제시”(대법원 판례)해야 한다. ‘그런 의혹이 있다’는 주장에도 똑같은 기준이 적용된다면 지금 쏟아지는 의혹제기 보도는 모두 처벌될 수 있다. 요구되는 수준의 소명자료 없이 의심스런 정황에만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정상인가. ‘그런 의혹이 있다’는 주장은 그 의혹이 진실이 아닐 가능성도 열어둔 것으로, 검증과 해명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 촉매제 구실을 할 뿐이다. 여기에까지 엄격한 소명자료를 요구한다면 후보 검증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김무성 대표나 고승덕 전 의원은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숙명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저 유명한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에서 정치인을 비롯한 공적인 인물의 특성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혹한 기후에서도 번창할 수 있는 불굴의 용기와 인내를 가진 강인한 사람.” 심학봉 의원처럼 사실이 드러나도 버티는 철면피성 강인함을 말하는 게 아니다. 허위나 과장된 비난에 직면하더라도 인내하는 강인함을 말한다. “민주사회에서는 공공의 사안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돼야 한다”는 원칙에서 나오는 강인함이다. 공직에 나섬으로써 검증과 비판을 자청했고, 이에 대응해 나갈 능력도 있으리라는 얘기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는 공적인 인물에 대한 의혹제기를 철저히 보장한다. 형사처벌은커녕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그래도 박원순 서울시장은 억울할 수 있다. 박 시장은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에 대해 “2012년 공개검증 이후 법원과 검찰, 병무청이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만 해도 이번이 여섯번째”라고 설명한다. 그런데도 새로운 증거도 없이, 의혹제기 수준을 넘어 막말을 일삼는 이들은 분명 도를 넘었다. 하지만 박 시장이 민사소송도 아닌 고소·고발로 대응하는 게 적절할까. “질서는 처벌의 공포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악마의 대변자에 대응하는 법은 선의 대변자들을 내세우는 것이다. 공적인 토론에서 발휘되는 이성의 힘을 믿고, 법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루이스 브랜다이스 미국 연방대법관)

박용현 논설위원
박용현 논설위원
끝으로 가장 강인해야 할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가 남았다. 박근혜 대통령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의 박 대통령 행적에 의문을 제기한 외국 기자와 인권운동가, 시민들이 명예훼손 혐의로 족족 기소됐다. 50%의 지지율을 자랑하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론의 장을 통해 이들을 제압할 용기와 인내는 없었다는 말인가. 검찰의 힘을 동원해 입막음을 해야 할 만큼 그날의 행적에 취약점이 있다는 것인가. 유엔인권이사회는 우리 정부에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고 공직자는 민사소송도 삼가라고 권고했는데, 대통령과 관련된 명예훼손 기소부터 남발되니 나라 꼴이 창피하다. 김무성 대표 등 현 정권의 수많은 공직자도 국민을 고발하고 소송을 냈다. 그도 모자라 김 대표는 ‘비판 기사를 많이 싣는다’며 포털까지 손보겠다고 나섰다. 민주주의와 이성의 힘을 믿는 강인한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공권력의 근육 뒤로 숨어버리는 나약한 공직자만 남은 것인가.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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